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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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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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위화도회군과 조선의 건국
서론
국내외 배경
무신집권기 이래 지방의 향리 자제들을 중심으로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한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원의 간섭과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문세족이 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왕권과 연결하여 고려후기의 각종 개혁정치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아직 역부족이었다.
원나라 이후 중원을 장악한 명나라는 과거 원나라가 귀속시켰던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지역을 명나라 영토로 하겠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 이에 대해 조정은 두 가지 의견으로 갈렸다. 공민왕의 반원정책 이후 실세로 등장한 친명파는 명과의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반면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요동정벌이라는 극한적 방식을 택하고자 했다. 명의 요구에 따라 국토를 그대로 내줄수 없다는게 명분이었다.
하지만 우왕이 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자 한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왕은 요동정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친원파 였던 이인임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지만 우왕은 당시 친명세력으로부터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공민왕 치세당시 개혁에 나팔수였던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과 격퇴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력을 확대한 장수들과 그들의 사병들도 잠재적인 위협요소 였다.
더구나 우왕에게는 문하시중 최영이 있었다. 최영은 이성계 등과 같이 전장을 누비면서 백성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왕에게 딸을 시집보낸후 세력가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우왕의 장인이자 국정에 최고 수반이었던 최영은 사위의 입지를 넓혀 주고자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고 반대하는 실료들을 귀양보내는 등 요동정벌을 위한 조치를 이따라 내렸다. 하지만 요동전선에 뛰어 들어야 하는 이성계나 신흥무장세력들에게는 이 일이 어쩌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성계가 이때 4대 불가론을 제시하며 요동정벌에 반대했다.
본론
위화도 회군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원나라를 압박하자 고려 조정의 외교 노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졌다. 친원파와 친명파의 정치적 노선 대립이 당시의 실권자 최영은 친원파의 입장에 서서 이 기회에 잃어버린 요동땅을 되찾고 이성계를 그곳으로 내보내 군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평소 이성계를 견제하던 최영장군은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의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조정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입지를 키우고자 하였다.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인 우왕은 팔도에서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1388년 4월 최영은 팔도도통사로 삼고 자군 통사에 조민수, 우군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최영은 개경에서 군사를 총 지휘하게 하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요동으로 출병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이성계는 요동정벌대신 말머리를 돌려 개성을 공격했다. 압록강을 건넌다는 것은 자신의 영원한 정치적 몰락임을 깨달은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 개경을 급습하였다.(위화도 회군) 요동을 공격할수 없는 4대불가론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최영을 비롯한 구세력들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4대 불가론이란 첫째, 소국이 대국을 칠수 없다. 둘째, 농사철에 군대를 일으킬수 없다. 셋째, 왜구가 쳐들어올 염려가 있다. 넷째, 여름이라 활의 아교가 녹고 전염병 위험이 있다.
위화도 회군 성공 후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성계일파는 한단계 한단계 새왕조 건설을 준비해 나갔다.
이성계는 먼저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이들을 폐위하는 ‘폐가입진’ 사건을 통해 보수 세력의 정치력을 해체 시킨 후 1391년에는 군제를 개편하여 국가의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리고 혁명의 마지막 단계로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차근차근 혁명을 완성시켜 나간다. 이 과정에서 이방원, 조영무 등은 온건파의 거두 정몽주를 무력으로 제거 함으로써 온건파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조선을 국호로 하는 새 왕조를 창건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진섭.『조선건국기 재상열전』.지성사.1998.
상종열.『도해 조선왕조실록』.이다미디어.2002.
신병주.『하룻밤에 읽는 조선사』.중앙M&B.2003.
정영애.『조선왕조오백년』.넥서스.1996.
www.history.go.kr
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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