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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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의 건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가야의 건국
■ 문헌으로 복원한 가야의 건국
가야의 건국과 건국 당시의 국가 모습에 관련한 연구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그러한 주장들을 사료를 중심으로 비교, 검토하여 여러 가지 주장들 중 과연 어떤 것이 옳다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 가야건국과 관련된 사료들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万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洛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 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踊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而歌舞. 未幾 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裏著抱持 而歸我刀家 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高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 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三國遺事 駕洛國記)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그 12대 할아버지[世祖] 수로(首露)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三國史記 金庾信傳)

首露王 壬寅三月卵生 是月卽位 理一百五十八年 因金卵而生 故姓金氏 開皇曆載. 임진년(A.D 42) 3월 알에서 태어나 같은 달에 즉위했다. 치세는 156년. 금알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으로 함. 에 실려 있음.
(三國遺事 王曆)

二十一年 秋八月 阿 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 賞功也 21년(서기 77) 가을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加耶) 군사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목베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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