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시키는 은혜 중생과 영적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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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변혁시키는 은혜
중생과 영적 감각 ; 칭의와 신생(중생)은 한 사건의 두 가지 면이며, 시간의 시점 상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의 본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것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위대한 변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갱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위대한 변화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갱신하는 데 중요한 것은 영적 감각들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로크의 경험론적인 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방법론(반사 이론)은 지식의 과정에서 마음에 우선권을 주는 것을 거부하며, 대신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것에 그 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내면의 직감적인 지식에 반대해서, 우리의 외부에서 오는 근원에 대한 경험에서 중개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살펴본다. 그것은 인간 마음의 우선권을 부정하는 것이고 참된 하나님 지식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성령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수를 잡으시고, 그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체험을 통하여 신적인 심정을 알기 전까지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 감각들은 그들 위에 찍힌 표시가 신적 은혜의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나아가서 이러한 종교적 지식은 하나님의 선물과도 같다. 즉 체험을 통한 하나님 지식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실재 안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 들이는 것과 같다.
성화하는 은혜 ; 웨슬리의 집의 은유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선행적 은혜의 현관 입구로부터 칭의와 신생의 현관문을 거쳐서 믿음의 충만이라 부르는 성화의 방으로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고 있다. 칭의로 말미암아 준비된 은혜의 근거 위에 건축을 계속하는 가운데, 중생은 성화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하는 과정이요, 신생을 모든 인간 실존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삶의 지속적인 전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성화란 타락한 피조물이 창조주와 교제하는 실존으로 회복하는 것이며, 인간의 창조될 때처럼 신실한 청지기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결을 증가시키는 것인데,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더욱더 강건하고 통전적으로 만들어가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생 안에서 시작된 갱신을 완성시키는 과정과 그 목표이며, 그리고 완전하게 하고, 그 완성을 가져오는 두 가지를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이러한 목표 지향적이며 목적론적인 것은 종교 개혁의 구원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수정이다.
루터와 비교하자면, 루터는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분량의 노력도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신적 완전에서 언제나 동일하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의 핵심은 하나님만이 실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눈에 죄인의 지위가 은혜로 말미암아 빚어낸 변화다. 그러나 웨슬리에게는 지위의 변화는 구원의 종착점이나 그 목적이 아니다. 왜 그런가? 위대한 구원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많은 것을 쌓아 놓고 계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된 우리의 역할을 다하도록 우리를 강건하게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죄의 본질과 사랑의 증가 ; 웨슬리는 죄에 대하여 알려진 율법을 자의적으로 범하는 것이라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이해를 따랐다. 웨슬리의 제일가는 관심은 죄를 어떤 책임감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우리가 의도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의식적으로 하는 ‘그런 일’에 죄를 제한시키려고 했다. 이런 죄는 하나님께 고통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저지른 아담과 이브의 예증적 죄의 성격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거나 혹은 무의식적인 범죄로서의 죄를 제외시키는데 이바지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웨슬리는 무의식적인 범죄의 중요성이나 혹은 그 실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로 구속하는 피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웨슬리안의 입장에서는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 첫 번째 과제는 우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고 쓸어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이 없다는 판단은 이 과제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죄를 의식의 세계로 끌어내어 은혜의 배경 안에서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죄를 인식하게 해달라는 웨슬리의 기도를 볼 때 결코 무의식의 죄를 간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웨슬리의 이러한 접근은 쉽게 포기해 버리는 인간 본성을 피하게 한다.
이를 종합하여, 대체로 새로운 창조 안에 우리는 세 가지 서로 나눌 수 없는 요소가 있음을 발견케 된다. 첫째는 은혜, 피조물과 세상을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솔선행위, 둘째는 믿음, 관계적인 형상을 재형성하는 능력에 대한 인간의 응답, 셋째는 신인협동, 이러한 새 힘을 세상과 공유하기 위해 창조주와 조화를 이루며 일하는 갱신된 이미지이다.
웨슬리는 성화의 강조 때문에 수동적으로 전가된 의를 인간에게 능동적으로 상속된 의와 바꾸어 놓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수동적으로 전가된 의(imputed)는 칭의와 더불어 덧입은 그리스도의 의다. 능동적으로 상속된 의(imparted)는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된 의를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둘이 서로 격리된 상태에 있는 한 그 어느 쪽이든 원치 않았다. 그가 믿기로는 진정한 믿음 안에서 이 둘이 합쳐지는 방법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전과 같은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고 변화되어,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피조물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귀결되는 것이다.
전적인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 모라비안들을 통하여 웨슬리에게 전달된 것은 자기를 내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믿음의 근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우리가 본 것처럼 용서하심에 단순히 만족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칭의는 그가 하나님의 충만한 형상을 추구하는데 통합되었다. 모라비안들이 칭의를 구원의 목적으로 삼아 도달하는데 반해서, 웨슬리에게 있어서 목적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과 사랑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웨슬리의 이중 목적이다. 나아가서 웨슬리는 전적인 성화는 다음 세상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살전 5:23, 마 5:48, 마 22:37의 말씀에 근거하여 죽을 때에 이렇게 완전에 이르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 하라는 명령임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기대하는 것은 감리교 경건에 있어 열쇠와 같은 요소이며 또 구별되는 특징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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