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보고서 제주 43 사건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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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주 4.3사건 보고서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에 살며 제일 많이 듣던 사건이다. 이 사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세대에 일어난 사건들 이기 때문에 전해 듣기만 하였고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슬 이라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영화를 보고 제주인들의 고통과 그당시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 또한 제주 대학교에서 주최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유적지 순례에 대하여 참여하게 되었고 제주4.3사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1. 제주 4.3 사건의 정의
제주 4·3 사건 또는 제주 4·3 항쟁은 1948.4.3 ~ 1954.9.21까지 제주도에서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제주 민중들의 항쟁과 그에 대한 미군정기때 군인과 경찰, 극우 반공단체들의 유혈진압을 가리키는 사건을 말한다. 이사건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확히 사건이 일어나게된 배경은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과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의 폭력에 대한 제주도 주민들의 반발등 여러 복합요소들로 얽혀 일어난 사건이다.
2.제주 4.3 사건의 배경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미군정당국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으며, 약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시대 때 경찰들의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같은 극우 반공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등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1948년 3월 1일에 경찰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총을 쏘았다. 미군정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 민심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군정경찰은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고, 오히려 제주도민을 폭도로 몰았으며 제주도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이 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추가로 파견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더 커져갔다.
3.유적지
1) 너븐숭이 4.3 기념관
너븐숭이란 널찍한 돌이라는 뜻이며 너븐숭이 일대는·1949년 4.3사건 당시 443명이 희생된 ‘북촌리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 또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장소이다. 이곳에는 애기 무덤과 ‘순이 삼촌’ 문학비, 위령비가 있다. 애기무덤은 이 때 죽은 아이들의 무덤인데 도로 주변에 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밤에 두려움에 떨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도로주변에 무덤을 만든 것 이라고 하였다.
또한 순의 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문학비가 신기하게도 쓰러져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을 형상화한 문학비라고 들었으며 문학비 아래에 깔린 빨간 화산송이들은 학살된 희생자들의 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들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결국 이상행동을 보이다가 자살을 한 ‘순이삼촌’ 의 내용처럼 그 당시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2) 제주 4.3사건 때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사라봉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을 곤을동은 ‘항상 물이 고여있는 땅’ 이라는 뜻처럼 4.3 사건이 일어나 사라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밝은 분위기의 땅이었을 것이다. 바다 가까이에 위치하던 곤을동 마을은 1949년 4월 1일 아침 9시경 군 작전으로 선량한 양민들이 학살되고 온 마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다. 그 당시 24명이 희생되었고 마을은 전소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을에는 집 한 채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이번에 한 채의 집이 들어와 곤을동 마을을 지키고 있다.
3) 4 .3 평화공원
4.3 평화공원은 4.3사건에 대한 보상을 위하여 4.3 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었다. 매년 4월 3일마다 4.3사건을 추모하기 위하여 추모 행사가 열린다.
다랑쉬굴의 비극 :4·3항쟁 당시 다랑쉬 오름은 구좌면 유격대의 전락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948년 11월 18일을 전후하여 김진생씨 일가, 고순경씨 형제, 박순녀 씨 가족, 이홍규씨 가족 등 대부분 부부와 어린아이가 딸린 가족단위로 다랑쉬굴 근처로 피난하였다. 다랑쉬 굴속에 있었던 고태원, 강태용, 고순경, 고두만, 함명립, 박봉관 등은 종달리 출신으로 한 마을 친구이자 형제들이었으며 이들은 4·3항쟁 후 만들어진 우익청년단인 대한청년단원들이었다.이들의 입산계기는 대한청년단 내부갈등이었으며 11월 18일 종달리에서 김호준과 채정옥이 무장대에 의해 납치되자 그 책임이 자신들에게 덮어 씌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다랑쉬굴로 피신하였다. 제9연대 및 경찰, 민보단 등 군·경·민합동토벌대가 합동토벌작전 중 다랑쉬굴의 피난민들을 발견하고 굴에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질식사 시켰다.
4.3 평화공원을 돌며 자세히 알지 못하였던 4.3사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아직 대통령의 사과를 받긴 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폭동이라고 규정짓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아팠으며 평화공원을 돌며 많은 사진들과 복원하여논 많은 전시물들을 보며 그 당시의 아픔과 애환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희생자들의 위령비에 꽃을 꽂으며 많은 고통을 느꼈을 희생자들이 그곳에서는 편하였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또한 4.3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많은 관심과 노력을 하여야되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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