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1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1
 2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2
 3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은 우리에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로 비춰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한반도의 통일국가 건설을 저해하고 민주주의의 발달을 억압한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이자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國父)로 숭앙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이 대통령과 그의 업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수를 웃도는 형국이다.
이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면서 해방 전후에 그가 미리 준비했던 건국 구상에 따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획기적 업적을 달성했다. 그 중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골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정치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1948년 제헌국회의 의방으로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기초한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여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승만의 ‘고집’으로 인하여 남한에 고스란히 도입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는 4·19 이후 10개월간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유지되면서 한국이 1945년 이후 독립한 전 세계 140여 개 신생국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나. 외교 분야에서 그는 대한민국 수립 후 유엔과 미국을 위시한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포함한 한반도 해역의 어족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특히 6·25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북진통일을 원하는 대다수 한국민의 소원을 무시하고 공산군과 휴전을 모색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에 협박과 회유를 동반한 ‘벼랑 끝 외교전술’을 동원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1953년 10월 한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19세기 후반 이해 14년에 한 번 꼴로 전화(戰禍)에 휩쓸렸던 한반도에는 장기간의 ‘긴장된’ 평화가 깃들었으며 남한은 미국의 군사 보호 우산 아래 정치, 안보,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공전(空前)의 비약적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킴으로써 한국의 안보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한국이 태평양권에 속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조성했다.
다. 군사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대미 외교를 통해 미군의 참전을 유도하고 ‘대전협정’을 통해 국군과 유엔군 간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형성, 유지하며 동시에 남한 국민 대다수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과 중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쟁기간 끈질기게 미국에 대하여 국군의 증편과 장비 현대화를 요구한 결과 전쟁 발발 이전 10만 명에 불과했던 한국군의 규모를 1954년에 65만 명 이상으로 대폭 증원하면서 그 질 역시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대한민국을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질 높은 상비군을 보유한, 동아시아에서 무시 못할 군사강국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라. 경제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집권기간에 일반 서민의 생활수준을 현격히 향상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미국으로부터 20억 달러 이상의 무상 원조를 받아내어 전후 경제복구에 성공했으며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특히 그는 6·25전쟁 발발 이전에 농지개혁을 개시하여 총 소작지 면적의 40%에 달하는 58.5만 정보의 땅을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는 혁명적 성과를 거두었다. 농지개혁은 대다수의 농민을 지주제의 속박과 착취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과거에 농노에 불과했던 대다수 농민을 주권의식을 가진 자립적 국민으로 탈바꿈시키고 남한의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자본 주의적 산업화를 태동시키는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농지개혁은 지주제를 붕괴시켜 전통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의 몰락을 초래하고 6·25전쟁 중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부화뇌동하는 현상을 예방하는 등 여러 가지 경제외적 부수효과를 수반했다.
마. 교육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년제 의무 교육제도를 도입, 실시하고 성인 위주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해방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률을 22%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그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대폭 중성하고 해외 유학을 적극 장려함으로써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산했다. 동시에 해외 유학생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는데,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규유학생’으로 출국한 학생은 4,884명, ‘기술훈련 유학생’으로 출국한 학생은 2,309명이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에는 ‘교육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경이적’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적자원이 조성되었다.
바. 사회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하여 지주제를 붕괴시킴으로써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양반제도에 종지부를 찍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및 취업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여성은 초등학교에서 남자와 똑같은 의무교육을 받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대거 진학하기 시작했다. 교육기회의 확대와 함께 여성의 취업기회가 확대되어 그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졌다. 저학력 여성들을 타자수, 교환수, 섬유노동자, 직조공, 피복공 등 직종에 취업하는가 하면 고학력 여성들은 교원, 의사, 약제사, 경찰관, 공무원, 여군 장교, 판·검사 등 과거 남성들이 독점했던 직업 분야에 침투했다. 나아가 국회의원 및 장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이래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차별대우를 받던 한국 여성들은 이 대통령 집권기간에 “가정의 깊은 장막 속에서 벗어나 눈부신 각광을 받으면서 사회의 밝은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 문화·종교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한글전용 정책을 채택해 여행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글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그는 전통문화의 계승 및 보존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사실상 무시하면서 기독교의 보급을 배타적으로 장려한 결과 원래 유교 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그는 ① 국가의 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② 국기(國旗)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로 대체하며 ③ 군대에 군목제, 그리고 형무소에 형목제를 도입하며 ④ 정부의 주요 부서에 기독교인을 대거 등용하고 ⑤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매체의 발달을 지원하며 ⑥ 6·25전쟁 중과 그 후에 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네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친정부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처함으로써 기독교 교세의 진장에 기여하였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