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사회의성격모두가 중심이 되는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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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미래사회의 성격 : 모두가 중심이 되는 세기
원시시대 수렵채취 문명 - 역사관과 세계관의 미분화
1만 년 전 인류의 대다수는 30-40명 단위의 수렵채취 집단으로 살고 있었으며 농경이 시작되는 신석기시대에 이르는 긴 기간의 원시적인 문화이다. 인류 학자들은 채집은 여자가 곤충류의 유충이나 식물의 싹 ·줄기 ·뿌리 등이 대상이며, 굴봉(掘棒) ·돌도끼[石斧] ·돌칼 등의 도구를 사용하고, 수렵은 남자가 들쥐로부터 들소 등의 큰 동물의 포획에 창 ·활 ·곤봉 ·바람총·부메랑 등의 도구를 사용하였다고 보고 있다. 사회조직은 대체로 단순하며, 가족 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방랑한 것이 많으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서는 복잡한 기구의 씨족조직도 찾아볼 수 있다. 또 신화나 주술(呪術) 등 특징있는 문화도 있다.
원시 시대는 경험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 경험으로부터 수렵채취를 하여 그들만의 생활을 유지했고, 그들의 뒤를 세대 역시 생존과 생활을 위해 무의식적 모방을 바탕으로 일종의 교육을 했다. 또한 자연현상으로부터의 안전을 우선으로 했고, 씨족조직이 가운데 집단의 단결과 질서를 강조하였다.
고중세 농경정착문명 - 원형사관의 형성 - 토지와 정주, 공간중심의 세계관
채집 수렵시대로부터 인류는 점차 목축·농경 문화를 영위하였으며, 이 두 문화는 역사적 ·지역적으로 서로 뒤섞여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생산기술이 다양해짐에 따라, 그와 함께 농경문화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농경생활은 토지에 고착하여 생장 ·결실이라는 계절적 변화를 보이는 식물의 재배에 의존하여야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착생활이 강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번기·농한기라는 생활의 리듬이 생겼다. 정착생활은 재물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생활의 리듬에 의하여 생기는 한가한 시간은 식료품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 이외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농경은 인간이 스스로 직접 식량을 만들어내는 생산경제이므로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식량의 절대량에 대한 제한이 없어진다. 또한 정착생활에 의해서 공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되어 생활의 안정을 확립할 수 있게 됨으로써 문화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인구증가와 정착생활에 의한 인간 ·사회관계의 복잡화는 촌락조직과 상호협조적 공동 노동조직 또는 토지상속을 매개로 한 부계(父系) ·모계(母系)의 계보관념과 그것에 기초를 둔 친족조직 등을 발전시켰다. 또 식물의 생장 ·결실이라는 자연의 변화과정을 인간의 힘과 책임에 의해서 재현(再現)하는 생활은, 식물 그 자체나 식물의 계절적 순환 또는 식물을 만들어내는 대지 등을 둘러싸고 곡령관(穀靈觀), 죽음과 재생관, 지모신관(地母神觀) 기타 여러 가지의 주술적 ·종교적 관념과 관습 ·행사 등을 발생시켰다. 이와 같은 각 방면에 걸친 농경문화의 발전은 그 후의 인류문화를 전개하는 데에 기초를 주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농경 출현 이후의 기간이 전체 인류 역사 중에서 차지한 비율은 10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그 동안에 일어난 인류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그와 같은 발전의 기초가 된 농경문화의 의의는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고중세 유목이동문명 - 선형사관의 형성 - 가축과 이동, 시간중심의 세계관
13세기 몽골족을 중심으로 세계제국이 형성됨으로써 유목세계의 힘이 최고로 발휘되었다. 유목은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상황에서 역사를 변화시킨 내연기관의 역할을 해왔다. 목축문화·가축사육문화의 한 형태. 물이나 목초를 찾아 가축떼를 이끌고 이동을 되풀이하는 형태의 목축을 주체로 하는 문화이다. 유목활동에는 일반적으로 봄·가을에 여름유목지와 겨울유목지 사이의 대이동이 있고, 방목지 안에서의 소이동이 있다. 그 생활은 거듭되는 이동에 순응하여 말·낙타 따위를 잘 타고 수레·썰매 등 운반도구가 발달하였다. 주거는 운반하기 편리한 천막류로 되어 있다. 또한 생활물자의 대부분은 가축들로부터 얻는데, 고기·젖 따위는 식량으로 하고, 털·가죽은 의류나 천막덮개 및 각종 도구의 재료로 삼았다.
유목사회에서는 자연 또는 인위적인 위협으로부터 가축떼를 지키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부계친족(父系親族)에 의한 조직(씨족이나 리니지 등)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방목으로 생산성은 농업에 비해 낮았다. 유목문화는 단독으로는 존속할 수 없으므로 항상 농경민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농경민과의 관계는 교역·약탈 등을 통해 유지하였으며, 그것이 때로는 정치적·경제적인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여러 왕조들과 몽골고원을 본거지로 한 투르크(터키) 및 몽골계 유목민의 관계인데, 이와 같은 현상은 중앙아시아·서아시아·동유럽·아프리카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현재는 영역국가에 의한 국경 설정과 유목민의 정주화 정책으로 유목민과 유목문화는 급속하게 쇠퇴해 가고 있다.
근현대 산업문명 - 나선형 사관 - 자본, 시공연속체 중심의 세계관
공업이 경제의 주축을 이루며 생활양식과 제도들이 조직화된 사회를 뜻한다. 미국의 경제사가 네프는 중세문명과의 대비에 있어서 현대문명의 본질은 양적 문명(量的文明)이며, 그 탄생은 생산성이나 능률, 즉 양의 추구를 지향하게 되면서 종래 거의 개발되지 않았던 광산업이나 정련업(精鍊業)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진 1540∼1640년의 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산업문명의 등장으로 그 시기의 영국 등지에서 볼 수 있었던 신종산업의 확립, 기술혁신의 전개, 대규모 경영의 출현 등을 포함한 변화를 초기산업혁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후의 산업혁명과는 달리 이 시대의 산업·기술상의 혁신은 전산업분야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며, 변혁의 주역이었던 자본도 절대왕제가 부여하는 특권이나 독점특허와의 결부가 농후하여 결국은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청산되고야 말 성격의 자본이었다. 따라서 초기산업문명은 산업·기술상의 변혁이기는 하였어도 사회적 변혁을 동반하지는 못하였다.
미래 정보화 문명 - 구형사관 : 나=우리=누리로서 모두가 중심이 되는 세계관
정보화 사회라는 개념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1962년 미국의 경제학자 프리츠 마흐럽(Fritz Machlup)으로, 지식산업이 주도하는 지식사회의 등장을 예견하였다. 정보사회(Information Society)라는 명칭은 1960년대 우메사오타다오(梅棹忠夫), 하야시 유지로(林雄二郞) 등의 일본학자들이 명명(命名)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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