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광주 민주항쟁의 성립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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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5.16 광주민주항쟁의 성립조건
1. 한국 자본주의와 지역적 불균형 발전
50년대 한국 전쟁 이후 미국과 일본에 종속적인 경제 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된 한국 자본주의는 70년대의 수출 지향적, 독점 자본적인 경제 개발에 의해 국가가 인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 체제로 확립되었다.
특히 당시 중화학 공업의 입지, 공업단지조성과 대자본의 집중도를 보면, 남동임해공업지역으로 집중되어있는데, 이것은 독점자본이 특정 지역에 편중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독점자본의 하청계열화에 의한 재생산 구조는 경상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전라도를 발전에서 더욱 소외시켰으며, 이러한 축척구조는 지역적 불균등 발전을 가속화했다.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공단을 중심으로 신도시가 형성되면, 농촌 쁘띠부르조아지는 도시 쁘띠부르조아지로의 변화가 수월하게 된다. 그러나 대자본이 거의 투자되지 않은 전라도 지방은 독점자본과 그에 따른 하청계열화의 재생산 구조가 미약했다. 또한 운송수단의 발달과 교통망의 확대는 국지적 시장권을 해체시키고, 전국적인 시장망을 확대시킴으로 인해 중소 자본을 몰락, 분해시키고, 재생산 기반을 더욱 위축시키게 되었다.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정체와 불균등 발전은 고용구조를 왜곡 시켰다. 전라도의 탈농화된 노동력은 지속적인 저임금, 농산물 시장에 의해 고용 기회를 박탈당하였고, 다른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전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자본 및 노동력 재생산의 면에서 가장 심각하게 소외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지역 불균형적 발전은 당시 각 계급간의 당시 직면한 상황과도 연관이 되는데, 당시 노동계급은 고용기회가 적었고, 실업자와 반실업자 집단이 상존하면서 불완전 취업구조를 지녔고 늘 저임금에 시달렸다. 그래서 국가권력 및 독점자본에 대한 저항이 것서 폭앞에 대응하여 싸울 조건이 갖춰저 있었다. 그러나 노동력이 영세 소기업, 서비스 업종에 집중되면서 조직적 역량을 축적할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기업 노동자들도 그들의 안정된 고용 구조로 인한 노동조합주의로 인해 단결의 폭이 좁았다.
그 다음으로 농민 계층은 곡가, 농정의 개방화 정책으로 인해 늘 생존권의 위협을 받았고, 일부는 저임금 노동자 혹은 도시 빈민으로 몰락하여 고용기회를 찾아 다른 도시로 전출하게 되었다. 특히 전라도 지방은 평야가 많아서 농민의 비중이 어느 지역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이들은 국가 권력에 강력히 저항하는 ‘함평 고구마 사건’을 보이기도 하나 그것은 고립 분산적이며 비지속적인 권익운동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또한 도시 쁘띠부르조아지는 서비스, 판매, 운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광주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지역 경제의 침체와 전국적 시장망을 가진 독점 유통기구의 침투로 인해 생존권의 위협을 받았고, 사회 비판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함께 교사, 목회자 등 중간 계층의 적극적 참여는 광주 민주 항쟁의 대중적 토대를 형성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중소 부르조아지는 자신들이 독점 자본과의 경쟁에서 타지역에 비해 자신의 확대 재생산이 수월하지 않음으로써 지배 권력의 국가 독점 정책에 상당한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초기 항쟁의 주체가 되었는데, 노동자, 농민, 도시 쁘띠부르조아지, 농촌 쁘띠부르조아지도 함께했다. 그러나 광주 항쟁에서 이들은 항쟁의 방향이 무장투쟁의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중산층과 중소 부르조아지들은 대거 이탈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를 소유했으며, 타협하길 바라지 직접적으로 무장투쟁 하는 것은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쟁 참여자들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면서, ‘진정한 민중블록’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은 대중정치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의 항쟁의 질적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2. 지역감정이라는 그늘
쿠데타로 정권을 쥔 박정희는 그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부담감으로 정치적 기반을 지역주의에 두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쿠데타의 주도세력에는 영남 출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인사 면에서도 영남은 우대, 호남은 소외하는 태도를 취해 고위관리들을 보면 영남 30.1%에 대해 호남은 13.2%였으며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의 각 정권에서도 똑같은 경향을 나타냈다.
이 구조는 경제발전계획에서도 뚜렷이 드러나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걸쳐 서울, 대구, 부산에 이르는 라인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진행시켰다. 이것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명백한 편견과 차별이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계속 불만을 쌓아갔다.
참고문헌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편,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박현재, 소나무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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