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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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나에 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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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나
수줍음 많던 내가 극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한 학부 3학년 봄이었다. 나를 규정하던 일정한 (스스로 강요해온)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소극적이던 학교생활도 바꿔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정말 생활의 많은 부분이 극회활동으로 인해 변해갔다. 그 좋아하던 운동을 줄여가며 대본을 외워야했고 학업과 밀린 과제를 위해 잠을 줄여야했다. 그렇게 3년가량 지났을 무렵, 내 안에 새로운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연 나에게 연극은 무엇일까?
처음엔 여차저차한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했지만 연극은 정말 거기까지인 것일까?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서, 또 비록 일천하지만 내가 체험한 연극 경험을 통해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교회 안의 새로운 소통 양식을 그리게 되었다. 깊은 숙고와 준비로 선포되는 ‘말씀’, 선포자와 호흡을 함께 하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말씀’을 수용하는 공동체. 아니 더 나아가 교회를 찾지 않거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이들도 기꺼이 귀 기울여 듣고 싶은 ‘말씀’(이야기)을 선포하는 것. 20세기의 교회는 이러한 노력의 필요성을 들어 [문화의 복음화]라는 교황문서를 이미 반포했고, 역사적으로도 중세 교회가 연극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깊고 풍요롭게 표현해낸 예가 있었다.
주교님께 나의 꿈에 대해 말씀드리고 예술학교 입학을 허락받기까지 5년이 걸렸다.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 통지를 받고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건네셨다. “신부님이 무대 위에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낼 때 관객들은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큰 위안을 주는 말씀이다.
가깝게 지내는 학교 친구들이 이따금 내 작업을 두고 말하기를 주제적 측면 쪽으로 중심이 기울어 있단다. 형식적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것은 곧 연극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단 뜻이기도 하고 자칫하면 연극을 ‘이용’한다는 혐의를 살 수도 있다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내 반론이 아직 궁색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런가 보다. 사실 난 ‘이야기’하고 싶어 연극을 한다. 사제로 살면서 만난 내 소중한 이웃들의 삶, 그 아름답고 치열한 이야기를 세상에 외치고 싶다. 아마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내용과 주제에 집착하게 되는가 보다.
전문사 과정을 수학하면서 세 편의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했다. 그중 두 편은 배우와 작가가 함께 참여한 즉흥 워크샵을 거쳐 만든 공동창작물이고 다른 한 편은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이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스스로 평하고 말하는 것처럼 멋쩍은 일이 있을까마는 반성을 위해 몇 가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처음 공동창작을 통해 만든 [두루 평안하십니까]는 상연 시간이 65분가량 되는 소품이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참여자 각자의 가족사를 쌓아 만들었다. 소박한 예산에 걸맞게 엉성한 무대였지만 일상 안의 세밀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네 삶의 보편적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거란 희망을 이어가게 해준 작업이었다. 하지만 연극 작업자로서 반성해 보자면 공간의 변화와 조명의 기능에 대한 몰이해가 고스란히 드러났던 작업이기도 했다. 내 안의 이야기를 얼마나 연극적으로 펼쳐낼 수 있는가가 최대 관심사이고 보면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공부였다.
두 번째 공연은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였다. 소위 말하는 부조리극 계열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매우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작품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텍스트를 정리하고 장면들을 연결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공연의 작가인 연출가에게 상상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체험한 시간이었다. 평소에 생각하기를 어떤 양식이나 전형성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내용이 그때그때 필요한 형식을 불러낼 것이라 여겼는데 막상 이오네스코의 작품을 접하면서 텍스트가 요구하는 표현 양식이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죽음을 기다리는 놀이’ 안에서 배우들은 서로 다른 시간 -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 - 을 넘나들어야 했고 아울러 그에 어울리는 상이한 태도를 가져야 했으며 연출가인 나는 그때마다 배우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놀이의 규칙을 발견해내야만 했다. ‘연극적인 연극’의 재미, 연극성에 대한 탐구를 목표로 열심히 작업했지만 -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한 결과를 냈는지 몰라도 - 공연을 마치고 보니 제대로 ‘살아있는’ 인물이 없었다. 연극은 결국 ‘배우 예술’인데 그 무대 위엔 어설픈 연출 의도에 억눌려 힘겨워하던 배우들이 대다수였다.
세 번째 작업은 역시 공동창작물인 [나비]였다. [왕은 죽어가다]에 뒤이어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그려볼 심산이었다. 소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착한사람 문성현]을 중심으로 몇 권의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고 즉흥하며 만들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만났는데 ‘장애와 죽음’이라는 소재가 너무 크고 추상적이라서 각자가 느끼고 표현하는 바를 하나로 묶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인형을 중심 오브제로 사용하고 장면의 변화와 배경을 영상물로 처리하기로 했지만 정작 필요한 기능과 치밀한 사전 준비가 없었기에 공연 막판에 엄청난 시간의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공연 역시 공간에 대한 연출적 안목이 몹시 아쉬운 작업이었다. 배우의 연기를 위한 공간의 규모, 배우와 함께 호흡하기에 적합한 무대와 객석의 거리 등에 대한 숙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음 학기엔 오태석 선생의 [자전거]를 공연할 예정이다. 앞서의 반성들을 토대로 텍스트에 대한 창조적 독해와 특히 공간 문제에 진지하게 매달려 볼 작정이다. 해서 공연을 본 사람들이 분단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품게 되기를 ...
앞서 언급한 대로 내게 연극은 ‘말을 건네는 행위’이다. 무슨 말을 할까? 주교님의 당부대로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그리고 나를 이야기할 것이다. 깨어있는 영혼으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우리 삶의 자리를 살펴 얻은 생의 가치, 그 진정성을 나누고 싶다. 물론 반성한 바와 같이 아직 ‘연극적으로 말하는’ 훈련이 한참이나 더 필요하다. 그러나 연극적으로 말하기, 또는 연극성이 어떤 특정의 고정된 꼴 안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가 발명의 동인이 되는 것처럼 건네야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에 따라 필요하고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표현을 꾸준히 찾아나갈 것이다.
연극사의 교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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