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자서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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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자서전 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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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의 집은 꽤 부유한 편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경기도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 홍천 등지에 우리 땅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연 500석 이상의 추수를 했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의 여파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자 우리는 종로6 가 116번지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지전상을 경영하셨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처음엔 꽤 괜찮았던 살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사업수완이 없으신 분이셨다. 어린 내 눈에도 점점 가게가 기우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으니 말이다. 가게의 몰락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가게장소의 변화였다. 처음엔 시장의 중심에 자리 잡았던 가게는 점점 시장의 외곽으로 마침내 변두리로 밀려나고야 말았다.
나는 그때 어의동에 있는, 지금은 효제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보통학교 6년 동안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이 즐겁고 신났다. 보통학교 공부가 끝나면 경기도립상고보에 응시해 볼 생각이었다. 무심한 척하셨지만 아버지 역시 나의 학업에 내심 기대가 크신 모양이셨다. 내가 성적표를 받아 오는 날이면 가게 문 앞까지 나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 정도 성적이라면 수영인 경기도립상고보에 갈 수 있을게다."
그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나의 운명은 그리 순탄치 못하였다. 나는 그 해 9월 가을 운동회를 마친 뒤 장질부사에 걸려 폐렴과 뇌막염까지 앓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저 까맣게 점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지만 가족들은 만약의 경우까지 생각하게 했던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이 일로 인해 서너 달 동안 등교하지 못함은 물론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진학 시험도 치르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진학 시험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기에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었기에 1년여 요양 생활을 지속했다. 그 사이 집은 용두동으로 이사하였다.
1년여의 요양생활 끝에 간신히 건강을 회복한 나는 이전에 소망하였던 경기도립상고보에 응시하였다. 사실 학업을 너무 오래 쉰 까닭에 지원하려는 생각을 거의 가지지 않았었다. 이런 나를 설득한 건 아버지셨다. 나는 8남매 중 장남이었다. 장남인 나에게 건 아버지의 기대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강권으로 경기도립상고보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이었다. 2차로 선린상업고등학교에도 응시하였으나 역시 불합격하였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1년 반이나 공부를 쉰 나로서는 예상했던 당연한 기대였지만 처음으로 내가 맛 본 실패란 것은 몹시도 씁쓸한 것이었다. 이후 나는 선린상업학교 야간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야간반을 졸업하고 주간2학년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는 사이 가세는 점점 기울어 용두동의 집을 줄여 다시 현저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22살이 된 나는 영어와 주산, 상업미술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이후 일본 유학차 도쿄로 건너가게 되었다. 선린상업학교 이종구 선배와 함께 도쿄 나카노에 하숙하며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조후쿠 예비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인가, 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일본 대학생들의 삶에 숨이 막혔다. 나는 보다 자유로운 나만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조후쿠 고등예비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내가 찾아간 곳은 쓰키지 소극장의 창립 멤버였던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였다. 나는 그 곳에서 연출 수업을 받았다. 예술가라는 사람들의 영혼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이 곳에서의 수업은 귀국하여 쓰키지 소극장 출신이며 미즈시나에게 사사받은 안영일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안영일은 당시 서울 연극계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밑에서 조연출을 맡았다. 이 후 나는 서울을 떠나 만주 길림성으로 향했다. 그 곳 길림 공화당에서 나는 「춘수와 함께」라는 3막극을 상연했다.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 영원히 못 돌아 갈 줄 알았던 고향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가족과 나는 길림역에서 무개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개천까지, 개천에서 트럭을 타고 평양으로, 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아직 종로 6가에 살고 계신 고모댁으로 갔다. 그리고 서너 달 뒤 우리 가족은 충무로 4가에 집을 얻어 옮겨갔다. 그 때 나는 에 시「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저 습작에 지나지 않는 작품으로 실질적 첫 작품이라 평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토대로 나는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하게 됐다.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리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무엇보다 시가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제 나의 생활환경이 더 이상 연극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 후 나는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 두고 이종구 선배와 함께 성북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이 외에도 박일영과 함께 간판 그리기, ECA통역 등을 잠깐씩 했다. 당시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할 만큼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도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인환이를 처음 만났다. 그 때 당시 나는 김병우, 양병식, 김경린, 임호권, 김경회, 박인환이 결성한 에서 활동하였다. 인환이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잘생긴 엘리트였다. 그는 당시 문단에서 인기가 좋았다. 나는 그가 부럽고도 또 그의 지나친 엘리트 정신이 뵈기 싫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찌됐던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꽤 재미났다. 나는 신시론 외에도 배인철, 이동구, 박태진, 박기준, 김기림, 조병화, 김관균 등 많은 문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나는 임화를 참 좋아했다. 그는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다. 그의 사상까지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사람자체가 좋았기에 그가 낸 청량리 사무실에서 외국 잡지 번역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이종구 선배의 친구였던 현경이와 결혼을 하게 됐다. 현경이는 이화여전을 졸업한 소위 말하는 신지식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 25라는 끔찍한 전쟁이 발발했다. 6 25는 나에게 여러 의미에서 끔찍한 전쟁이었다. 전쟁 3일 후 서울이 점령됨에 따라 월북했던 임화, 김남천, 안회남 등이 서울로 돌아와 종로 2가 한청 빌딩에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실을 열었다. 나는 김병욱이라는 후배 문인의 권유로 문학가동맹에 나갔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나는 위에서도 말했듯 사상을 넘어 그들의 문학과, 임화라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으로 동맹에 가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9월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강제 동원되어 평남 개천으로 끌려가 1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나에게 있어 지옥과 같은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이때를 꼽을 것이다. 그들의 이념 전쟁에 죄 없는 시민들이 희생된다는 것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했다. 나는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20일 기회는 왔다.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나는 평양 북쪽의 순천에 배치되었다. 유엔군과 인민군의 혼전을 틈타 나는 야간 탈출을 시도했고 성공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나는 서울 충무로의 집 근처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던 듯싶다. 집을 100M 남겨 둔 지점에서 나는 경찰에 체포당해 이역만리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게 되었다. 물론 가족 중 누구도 이런 내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아내는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정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