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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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문제
서구가 중세의 지방 분권적인 지배 질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신교와 자본주의의 결합이 가능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중세의 중앙집권적인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유교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였으므로 서구의 자본주의는 ‘밑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는 ‘위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서구에서는 귀족과 대항하며 성장하던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정치문화적인 지배 계급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노동자 계급을 포섭하였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자생력이 없는 ‘부르주아’를 국가 관료가 경제적으로 육성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문화적으로 지도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를 이룩하였기에 노동자 집단 역시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에 두고 통제와 보호를 하고 있으며, 서구에서는 부르주아 집단의 독립적인 ‘경제적 경쟁력’이 가장 중요한 자본의 축적 수단이었지만, 동아시아의 ‘유교자본주의’에서는 지배 세력과의 ‘정치적 유착’이 가장 중요한 자본의 축적 수단이고, ‘개신교자본주의’는 모든 경제적 거래에서 ‘배타적 재산권’의 확립을 경제 활동의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는 전제 조건으로 생각하지만, ‘유교자본주의’에서는 배타적이고 사적인 소유권보다 공공의 질서와 이해를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정치 집단 즉 집권 관료의 개입과 보증이 모든 경제적 거래의 궁극적 기준이 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중시하는 『도덕감정론』(1759년)과 경제주의적 사고를 중시하는『국부론』(1776년)을 통해 우리에게 도덕과 이익의 조화 문제(개인적 차원)와 윤리적 질서와 경제적 효율성의 조화 문제(사회적 차원)를 화두로 던지고,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로운 역할을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당시의 현실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 추구의 확대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향했고, 그의 관점 또한 시간의 흐름과 비례하여 경제주의적인 면으로 기울어졌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비록 개인의 이익 확대와 사회적 윤리 질서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 문제를 조화롭게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호한 방법에 의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이론은 불균등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인 대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부르주아 중심의 이익 확대를 승인함으로써 경제와 윤리 관계의 소원화와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합리화하는 역할로 기능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의 범주에 속하는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토마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76-1834)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등에 의해 정초된 근대 자본주의론은 산업 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산업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성립시킨 이론 체계로, 집단으로부터 독립된 개인의 재산과 생명을 중시하며,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개인의 이익을 강하게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반영하기 때문에, 민중들의 곤궁함을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과 민중의 인권을 신장시키려는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자본가의 효율적인 경제 활동을 통한 이윤 증대에 더 큰 비중을 둠으로 인해 경제와 윤리의 문제를 간과했다. 개인 중심의 이익 추구가 빚어내는 결과는 결국 나 아닌 타인을 배제시키게 되고, 사회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전개되어 극단적인 혼란이 도래하게 한다.
그러나 전통의 유교(동양 또는 한자문화권)에서는 이기심의 심리적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인욕에 대해 학자나 학파에 따라 이론의 편차가 존재하지만, 근대 자본주의론에서 중시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 확대에 대해 사회의 조화로운 질서에 장애가 되는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전통의 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제를 인류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재화를 획득하여 사용하는 행위의 측면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잘 경영하여 민중을 어려움에서 구제한다(經世濟民)’는 의미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의 행위와 의식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와 분리하여 독립시키지 않고,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윤리적 가치와 긴밀하게 관련시켰다.
이 때문에 전통의 유교에서는 경제와 윤리의 문제에 대해 이익과 의리의 관계 문제로 여겼다. 이익의 개념은 춘추 시대에 백성들의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생산물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 의한 소유의 개념으로 확산되었기에,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기서 결국 재정학과 상품 경제의 중요성에 주의하지 않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 발전에 소극적인 작용을 해 문제점을 야기했다. 개인의 사욕과 이기심에 대한 긍정 여부에 관계없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 또한 동양의 문제인 것이다.
현대 문제
실제를 중시하는 사유 체계와 일정 정도 차이를 보였던 관념론적 경향의 ‘서양 철학’ 확산은 정책 담당자들에 의해 추진된 산업화 과정에 나타난 각종 소외 문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중 상당수는 시민의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철학 이론을 소개하고 전파했다.
자유주의에서 ‘시민’은 생산 수단의 사유화 정책에 의해 생산 수단을 많이 소유한 유산자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민중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형식적인 평등이 인정될지라도, 사회적인 적합한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사회 구조적인 면에 의해 소수의 유산자와 다수의 무산자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유산자의 자유가 확대되는 것과 달리, 무산자의 자유가 제약될 뿐 아니라 인격의 소외 현상이 발생한다.
자유주의는 바로 소외된 사람의 관점에서 철학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부를 확보한 사람들의 관점을 지지한다.
특히 요즘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보다 더 심하게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민중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사회 구조적으로 형성되면서 나타필자는 민중의 소외 현상에 대해 철학이 외면해도 되는가. 구소련과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가 망했다고 해서 자유주의 이념에 의해 소외받는 민중들의 인권이 방치돼도 되는가. 비록 계급적 구분에 의해 목숨 걸고 적대적으로 투쟁하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현대의 철학자들이 이에 대한 대안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어느 한 나라에서만 일어필자는 현상인가. 이것은 이른바 ‘서양 철학’이나 ‘동양 철학’ 중 어느 한 진영의 문제인가. 우리 철학계의 공동 문제의식으로 삼을 수는 없는가. 여기에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아우르고 넘어서는 방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환경 파괴 문제 역시 인간과 자연의 단순한 대립 구도로 보기보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인간과 인간의 대립 구도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사회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에서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심층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이나 도덕주의를 전제로 하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 혹은 자연에 귀의하는 인간의 모습 등을 말하는 ‘동양’의 일부 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의 사상은 커머너의 주장에서 드러나듯 ‘자연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면과 천( ‘선’이라는 내용을 전제한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갈 경우 인간의 역사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문명을 부정하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환경 파괴에 의한 문제보다 자연 재해나 자연의 위협 혹은 약육강식의 자연 질서에 의한 피해에 대해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과학 기술을 활용하면서 문명을 형성해 왔다. 자연을 파괴하는 과학 기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과학 기술조차 폐기하라고 주장할 경우 나타나는 역기능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심층 생태주의적 방법과 이러한 생태주의와 결합하려는 일부 ‘동양 철학’적 이론에 대해 부분적인 의미는 있을지라도 종합적인 대안이 되기에 역부족이다. 이익 확보를 위해 탐욕의 눈으로 자연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이 과학 기술조차도 자연을 파괴하는 방면으로 사용하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사회 생태주의자들이 이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 전통 철학자 중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실제적으로 접근한 사람이 있다. 왕부지는 단순하게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주장하지 않는다. 왕부지는 그가 인간과 자연이 아무 매개 없이 도덕주의적 관점이나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귀속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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