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논쟁을 통한 조선 사회의 가치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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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단칠정논쟁을 통한 조선 사회의 가치관 분석
1.사단칠정(四端七情)이란?
인성(人性)을 설명하는 조선 때 송 나라 성리학의 학설. 사단(四端)은 맹자가 주장한 것으로 사덕(四德)의 원천인 인(仁)의 단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의 단(端)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의 단(端)인 겸양지심(謙讓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의 단(端)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가리키며, 칠정(七情)은 와 자사(子思)의 에 나오는 인간의 7가지 감정인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말한다. 사단론은 이미 맹자가 밝힌 바이나(인간이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사단을 확충해야 한다고 함). 조선 때 이황은 여기에다 칠정의 이론을 첨가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설명하였던 바, 사단은 인간의 이(理)에서 발(發)하고, 칠정(七情)은 인간의 기(氣)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이 후 이 사단칠정론은 유학자들 사이에 오랜 동안 논의되어 이른바, ‘사칠변론’이 생겼으며, 그 중에서도 퇴계와 기대승(奇大升)과의 논쟁은 유명하여 라는 논집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사단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론한 것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칠정(七情)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용어로서,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의 인간의 감정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인간의 감정이기는 하되 사단은 애초부터 선한 것으로 규정된 것인데 반하여, 칠정은 그 자체로는 아직 선악의 판정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칠정은 구체적 상황과의 접촉 이후에야 비로소 선악으로 판정된다. 예를 들면 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은 언제나 선이다. 그렇지만 칠정의 하나인 기쁨은 언제나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만약 남의 불행을 기뻐한다면, 그것은 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理)는 뭐고 기(氣)는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잠깐 !! 이기론에 대해 살펴보고 가자
○성리학적인 이기론
성리학은 자연·인간·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만물이 생성·소멸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한편 이는 만물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의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성리학에서 이와 기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명제로 ‘이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는 말을 들 수 있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
이이의 학문은 이와 기를 분리하여 보지 않는 이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만이 에너지를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기가 움직인 다음에 이가 원리로 작용한다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여 이기는 선후가 없음을 강조하고 이의 자발성을 부정했다. 이황에 비해 기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으나 이의 보편성과 주재(主宰)성을 덜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이의 사상을 서경덕의 기일원론과 비슷하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쨌든 기의 역할을 강조하는 면은 그의 사상으로 하여금 현실적·개혁적인 성격을 갖게 했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
이황의 학문은 이와 기를 분리해서 볼 것을 강조하는 이기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동(理動)과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는 이귀기천(理貴氣賤) 사상에 입각한 이기호발설 등을 주장하는 등 도덕적·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는 지행호진(知行互進)의 원리로 경(敬)을 강조했지만, 그의 실천은 관직을 통한 정책시행 등 적극적·경세적인 측면보다는 개인의 교육을 통한 소극적·윤리적 측면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당시 사회모순을 사회경제정책의 차원이 아닌 인간 내면의 도덕성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 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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