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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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전에 알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는 일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이번에도 김연수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문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많은 작품들과 작가들을 미리 접하지 못한 것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남은 작품들을 접할 생각에 설레어진다.
우선 김연수는 쉽게 글을 쓰지 않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쉽게 글을 쓰는 작가가 있을까 싶지만, 왕성한 창작력으로 무수한 작품들을 내놓는 작가들이 꽤 있는 것을 보면 김연수는 많은 작품을 내는 일보다 작품의 완성도에 힘을 쏟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했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이 작품이 보통 소설과는 다르게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자료 수집 능력 그리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 쓴 작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앞선 작품들을 읽는 시간에 비하면 이 글은 한 문장을 읽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가독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너무나 떨어지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분명 작가의 분석적이고, 탐구적인 글쓰기에서 오는 작품의 심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만큼 작품을 읽은 후에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 여기서 작가의 노력과 열정으로 쓰여 졌을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작품에서 ‘나’와 ‘그’가 혼재하는데, ‘나’는 ‘그’가 읽은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을 단 교수이고, ‘그’는 죽은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었을 즉, ‘나’가 주석을 달아 놓은 『왕오천축국전』을 읽은 남자이다.
‘나’는 ‘그’가 수첩에 기록한 문장들과 ‘그’의 등반일지를 읽으면서 ‘그’의 존재와 생각을 대변해준다.
‘그’는 여자 친구의 죽음으로 고통 받는 남자이며, 여자 친구가 남긴 유서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없음에 더 괴로워한다.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 친구가 자신에 대한 말 한마디 없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여자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유서에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무수히 많은 책들을 읽고 ‘그’는 책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었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게 되고 여자 친구가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한다.
『왕오천축국전』과 여자 친구의 유서의 공통점을 찾자면 빈자리이다. 『왕오천축국전』에서 주석자인 ‘나’ 조차 알 수 없는 122행의 앞 세 글자와 여자 친구의 유서의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 라는 내용에서 “없었습니다”라는 존칭에서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틈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빈자리, 빈틈은 어떤 것으로 채워야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왕오천축국전』의 빈 글자를 찾듯이 상상과 추측을 통해 여자 친구의 유서의 빈틈을 상상하지만 끝내 여자 친구의 유서의 빈틈을 채우지 못한다.
그 후 ‘그’는 혜초의 흔적이 있는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하는 동안 모든 것을 기록한다. 하지만 등반 과정에서 부딪히는 육체적 한계로 인해 멈춰지는 기록은 수첩에 여백으로 남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백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말하지 않는 것 뿐’ 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산악부 시절 처음으로 등반했던 도봉산에서, 육체적 한계를 넘어선 지점인 정상이라는 공간에선 어떠한 말과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지점은 글로써 더 이상 쓸 수 없는, 문자로써 설명하지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안으로만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 곳에서 ‘그’는 빈틈을 이해할 수 있는 뜻을 깨달았을 것이다.
릴케의 문장에서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고, 믿어버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서 ‘우일월정과설산’, ‘동유일소국’에서 설산을 넘으면 나오는 나라를 이야기했는데, 이름은 소발나구달라국이라고 하고 토번국의 관할 아래 있으며 의상은 북천국과 비슷하나 말은 다르며 지대가 대단히 춥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혜초가 직접 가보지 않고 쓴 글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여자가 왕인 여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혜초는 이점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았고 우리는 『왕오천축국전』 이후에 문장들을 접하기 전까지 새로운 사실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분명 진실이 있음에도 우리는 보여 지는 문장과 기록이 없으면 알 수 없으며 반대로 보여 지지 않는 것에선 진실과 사실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등반일지에서 마지막 문장을 쓴 이후에도 그는 꿈을 꾸고 있었고, 또 다른 진실과 마주했을 것이다.
작가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같은 역사의 기록, 여자 친구가 남긴 유서의 문장들, ‘그’가 쓴 등반일지 같은 문장의 기록이 충분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기록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을 탐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작품속의 ‘그’는 문장과 글쓰기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여자 친구의 죽음과 유서의 빈틈을 스스로 소멸을 선택함으로써 이해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나’가 ‘그’는 검은 그림자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바람에게 밀려 올라갔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곧 설산을 넘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 의해 ‘그’는 기록되어 졌을 뿐이다. ‘그’의 진실은 ‘나’의 진실과는 또 다를 것이다. 이처럼 모든 진실은 기록의 너머,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뒷면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는 기록할 수 있는 문자화, 규정화 되지 않은 그 자체의 순수성을 가진 세계일 것이다. ‘그’의 여자 친구가 선택했고, ‘그’가 따라간 설산을 넘으면 나오는 그 곳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