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라쇼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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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라쇼몬
아무생각 없이 선정하게 된 영화 ‘라쇼몬’은 찾기도 힘든 아주 오래된 흑백영화였다. 1950년에 만들어진 이 일본영화는 우중충한 폭우속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 승려의 ‘모르겠어’라는 대사로 이미 어떤 사건이 진행됐음을 짐작케 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와 도깨비가 살았지만 폐허로 변해버린 절은 그들이 나누는 살인사건에 대해 더욱 암울하면서 흥미롭게 하는 것 같았다. 오래전 영화라는 낮은 기대감과는 달리 영화는 빠른 몰입도를 가지고 있었다. 다조마루, 마사코, 다케히로의 각자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가장 유심히 본 것은 마사코라는 인물이다. 영화 내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이며, 이 살인사건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마사코는 모두 다른 여인으로 나온다. 다조마루의 이야기 속에서는 남편을 버리고 다조마루에게 몸을 내주지만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치는 비겁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관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다조마루에게 몸을 더럽혀지고 자신의 남편에게 돌아갔지만 남편에게 버려져 자살을 시도하는 순정녀로 나온다. 다케히로의 이야기에서는 다조마루에서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비겁한 인물로 나온다. 이야기 속 마사코를 보면서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화는 사람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행동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장면은 나무꾼의 이야기 중에 마사코가 자신의 상황을 울면서 절망하다 갑자기 소름끼치게 웃으며 두 남자의 싸움을 조장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인 것 같았다. 마른하늘 소나기처럼 갑자기 바뀐 여자의 표정은 그전까지 울던 모습이 모두 연기였다는 사실에 관객도 불쾌감을 느꼈을 것 이다.
나무꾼의 이야기가 끝나고 버려진 아기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승려,걸인,나무꾼의 이야기 중에 걸인이 버려진 아이의 물건중 돈될만한 것을 가져가려하자 나무꾼의 이를 저지하려 한다. 이때 나무꾼이 마사코의 단검을 가져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승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 부분에서 나무꾼에 대한 실망을 하지만 이후 6명의 자식이 있는 아버지고 울던 아이도 데려가 키우려는 모습에 승려는 다시 안정을 찾는다. 이 부분에서 나는 나무꾼은 6명의 자식을 위해 값비싼 단검을 훔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무꾼의 상황을 몰랐던 때의 나무꾼의 모습과 상황을 알고 나서의 나무꾼의 상황은 많이 다르게 보였다. 영화에서처럼 하나의 사건을 놓고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모습을 나 스스로 체험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작년 일본학과 전공수업을 들을 때, 담당 교수님께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다른 영화는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선뜻 찾아서 보게 되지는 않았다. 워낙 명성이 자자한 감독이라서 왠지 영화의 내용도 어렵고 난해할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심리철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다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접하게 될 기회가 생겨 고민 없이 「라쇼몬」을 선택하게 되었다. 영화의 제목 ‘라쇼몬’은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등장인물들이 대화하는 장소의 이름이다. 한자로 ‘그물 라’에 ‘날 생’, ‘문 문’자를 쓴다. 개인적으로는 이 ‘나생문’이 그물처럼 얽히고 설켜 있는 우리네 인생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내용도 한 사건에 대한 각각의 인물들의 엇갈린 진술들로 전개된다. 다조마루(도적), 마사코(아내), 다케히로(남편) 세 사람에게서 있었던 일과 그에 대한 각자의 진술을 나무꾼과 승려, 걸인이 되새기기 시작한다. 다조마루는 악명 높은 도적으로 마사코에게 반해 그녀를 겁탈하고 그녀의 부탁으로 다케히로를 살해했으나 그 틈을 타 마사코는 도망을 쳤다고 주장한다. 마사코는 비록 몸은 더럽혀졌지만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눈물로 호소했지만 남편은 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남편을 살해하게 되었다며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보인다. 누구에게든 이미 살해된 다케히로는 직접 진술할 수 없으므로 무당의 몸을 빌려 자신의 원통함을 말한다. 다조마루에게 겁탈당한 후 그의 설득으로 인해 남편을 버리기로 한 마사코는 다조마루에게 남편을 죽이고 떠나자고 한다. 다조마루는 그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해 오히려 다케히로의 편으로 돌아선다. 틈을 타 마사코는 도망을 치지만 다케히로는 자결을 하게 되었다고 호소한다. 이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은 걸인에게 자신이 본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걸인은 이마저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는 완전한 거짓도 완전한 진실도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나무꾼의 양심을 통해 나무꾼의 진술에 힘을 실어주는 듯도 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무꾼도 자신의 욕심으로 위증을 했기 때문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승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게 되고 허망함을 느낀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흔들리지 않고 일관적인 캐릭터는 바로 걸인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재미만을 추구하고, 진실하지 못한 인간의 무서움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한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듯 인간은 누구나 이중성을 갖고 있다. 결국 인간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고 그 인간을 통해 나온 것들도 모두 진실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도 확실할 수 없다. 확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애초에 ‘확실’이라는 것 자체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대상을 보고 판단한다. 어쩌면 가장 확실한 것은 ‘확실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설명 없이 최대 다수가 인정하는 어떤 것. 이것이 최선이 아닐까.
‘라쇼몽’이라는 이 영화는 스님과 나무꾼이 비를 피해 들어온 사내에게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해주는 이야기이다. 한 사무라이가 살해당했는데 그를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이 다 다르다.
도적은 여자가 자신과 남편 중에 이긴 사람을 택하겠다고 하여 자신이 그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자는 겁탈당한 자신을 남편이 증오의 눈으로 바라봐 무서워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샌가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죽은 남편의 영혼이 들어온 무당은 도적이 아내를 겁탈한 후, 자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고 그에 아내는 황홀한 듯이 쳐다보았고, 그런 모습을 남편은 처음 보았다. 아내는 도적에게 어디론가 데려가 달라고 하며 남편을 죽여 달라고 했다. 그에 도적은 남편에게 이 여자 죽일까? 라고 물었고 남편은 그 모습에 도적을 용서했다고 하였다. 세 사람 그리고 나무꾼의 목격담 까지 모두 이야기가 다르다. 이야기 후 아이를 발견 하는데 스님은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그에 스님은 원래 그런 세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무꾼이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여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 사무라이가 죽은 똑같은 상황을 네 사람이 서로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거짓말로 하여금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바꿔 말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의 자존심, 수치심, 이기심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거짓말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 대사에 이런 부분이 있다.
"인간들이라는게 다 그렇지 뭐.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잖소. 인간은 악한 존재이기에 거짓말을 한다."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 하다보면 어느새 진실은 잊혀지고 거짓말이 진실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를 다들 한번쯤은 경험 해 보았을 것이다. 순자의 성악설, 그리고 대사에서처럼 인간은 악한 존재,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거짓말은 인간의 부정적인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세상을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고 스님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무꾼이 아기를 데려다 키우겠다고 나온다. 나무꾼으로 하여금 세상이, 인간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또한 희망적이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물론 인간은 악한 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전부는 아니지 않나.
- 이야기는 한 사람의 입을 빌어 시작되었다. 그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사건은 속한 세 사람 모두의 이야기가 달랐다. 진실은 하나이니 사건을 진술한 이들 모두가 저 좋을 대로 사건을 왜곡하였을 터였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들을수록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말이 너무나 그럴 듯하여 나는 그 중에 가장 호감이 가는 사람의 말을 진실이라 믿으려 했다. 내가 그의 말을 진실이라 생각하려한 것은 단지 진실이라 생각할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