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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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문화관
레비나스 철학의 배경
‘네 문화의 철학자’
레비나스 사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은 히브리 전통의 성경과 탈무드, 어릴 때부터 읽었던 러시아 문학,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의 책이었다.
그는 후설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현상학은 삶의 잊혀진 경험을 드러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는 작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타자 및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해되었다.
‘주체성의 변호’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자체가 빚어낸 파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관한 연구재의]에서 “전쟁 가운데 스스로 내미는 존재의 얼굴은 서양 철학을 지배하는 전체성이라는 개념 속에 고착되어 있다”고 말한다. 전쟁의 폭력과 서양 철학은 다 같이 전체주의적이다. 이 말은 둘 다 인간의 인격을 하나의 체계에 종속 시킨다는 것이다. 전체 체계 속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어떤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제거된다. 전쟁의 폭력은 근본적으로 절대적, 인격적 가치를 부인하고 전체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으로부터 흘러나오다. 전체성의 체계가 인간과 현실의 의미를 규정할 때 인간은 그 개체로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 전체주의적 철학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의 이름으로 대항한다.
전체주의에는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 개체는 전체의 한 부분일 때,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존재의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개체의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로 대치하고 이것을 또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
레비나스는 주체의 주체성을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해 ‘다른 이즉 타인은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임을 강조한다. 레비나스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은 주체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무한자의 이념에 바탕을 둔 주체성의 변호” 이며 무한자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이란 타자를 받아들이는 주체성임을 밝히고 있다. 레비나스는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이론적 활동이나 기술적, 실천적 활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주체가 주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지식 획득이나 기술적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타인을 손님으로 환대하는 데 있다고 본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 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글ㄹ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서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향유의 존재로서의 나의 존재
레비나스는 자기성의 성립, 또는 개체성의 성립 없이는 타인의 영접과 타인에 대해 책임지는 윤리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자기성 또는 개체성은 먹고 마시고, 삶을 즐기는 가운데 발생한다. 한 개인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어떤 누구에게도 환원될 수 없는 개별적인 행위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레비나스는 ‘향유’라고 부르고 향유 즉 즐김과 누림을 통해 하나의 개체가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한다고 본다. 이때 또한 주체성의 모습이 최초로 드러나는 것으로 본다.
타자의 존재와 윤리적 관계
인간은 신체적 존재로서 세계 안에 거주하는 존재이고 근본적으로 경제적 존재이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인간 존재의 ‘욕구’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욕구는 ‘결핍’을 전제로 하고 결핍은 인간의 집단적 노력과 경제 활동을 통해 충족될 수 있다. 욕구의 질서는 그 자체 하나의 전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전체성이 깨어지고 삶의 무한성을 가능하게 하는 차원을 그는 ‘욕망’또는 ‘형이상학적 욕망’으로 본다. 욕망은 개체를 넘어서 타자 또는 무한자와의 관계에 대한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전체주의,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주의, 또는 쾌락주의나 세속주의를 통해 충족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와의 열린 관계를 통해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의 현현”을 통해 접근한다. 얼굴의 현현은 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은 일종의 계시라고 말하였다. 얼굴의 현현은 일종의 윤리적 호소이며 얼굴은 나에게 명령하는 힘으로 다가오며 이 힘은 강자의 힘이 아니라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서 오는 힘이다. 타인의 곤궁과 무력에 부딪힐 때 나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타자의 경험은 내 자신의 불의와 죄책에 대한 경험과 분리할 수 없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 있는 타자는 나의 주인이다. 나는 내 자신을 벗어나 그를 모실 때 비로소 그때 그와 동등할 수 있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 타인은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내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타인은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성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이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인의 존재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타인과 윤리적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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