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 공동체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상 일본의 아시아 인식과 정책기조 일본의 안보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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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시아적 공동체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상 일본의 아시아 인식과 정책기조 일본의 안보공동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아시아
서론
국제사회 속에서 다양한 불안요소와 위협요소들은 줄곧 국가들을 연합시킨 동력이 되었다. 소련에 대한 위협 때문에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가 가능했었으며, 독일에 의한 전쟁재발 우려와 미국 경제체제에 대한 불안 덕분에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으로의 행보가 진행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역안보적 국가연합은 비단 서구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시아에서도 공산권에 대한 위협으로 논의되었던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 ASPAC)의 사례가 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되기 전까지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과의 양자외교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아시아적 연합’이라는 구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아시아 공동체의 논의가 활성화 될 수 있었다. 본 글에서는 아시아적 공동체 구상과 실행과정 속에서 일본이 어떤 논의를 가졌으며, 어떤 안보적, 경제적 정책들을 펼쳤는지 살펴보고 앞으로 일본이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 전망하도록 하겠다.
아시아적 공동체
(1) 구상과 역사
‘아시아적 연합’에 대한 구상은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이미 일본에 의해 구상된 바 있다. 서구열강의 압력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속성을 띤다. 서양 제국주의의 침입이 자국의 산업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일본의 제국주의는 서구에 대한 대항의식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 구상되었던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은 서구에 대한 방어기제에서 시작된 아시아 침탈의 위장전술이었던 셈이다. 러일전쟁과 1차 대전이후 세계적 위상이 급부상한 다이쇼(1912-1926)시대와 함께 아시아연대의 존재의미 상실은 이를 방증한다. 한상일(2011). “동아시아공동체의 역사적 재조명-담론과 정책”『일본과 동아시아』EAI. p.18
그러나 관동대지진(1923)과 30년대 금융대공황은 일본사회의 불안을 다시금 일으켰고, 미국의 해군군축압박과 미국과 일본의 군축 논의는 워싱턴회의(1921.11.12-1922.2.6)를 통해 영미일 보유 주력함 비율을 5:5:3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일본은 명목상 세계 제 3위의 국가로 올라섰으나 실질적으로 해군군축을 통해 많은 제약을 받는다. 이는 일본 내 극우적 군벌의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오기평(2007).『세계외교사』 p.384)
중국의 반일성향 고조는 다시 한 번 일본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는 ‘동아협동체’라는 담론이 등장하였고, 동양의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낸다. 이 요구는 중일전쟁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으며 동아시아의 ‘신질서 건설’이라는 명목으로 ‘대동아경영권’ 구상이 발표되었다. 한상일(2011). “동아시아공동체의 역사적 재조명-담론과 정책”『일본과 동아시아』EAI.pp.22-23
(2)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상
위에 언급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들은 결론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위한 독단적 지도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때문에 일제의 패전과 함께 백지화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동체 구상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APEC 형성과정에서 일본이 호주를 앞세운 이유로 아시아 국가들의 혐일 분위기가 제시된다.
현대의 평화적이고 본격적인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세안지역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 아세안+3(ASEAN Plus Three: APT), 그리고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n Summit: EAS)는 본 구상의 실현을 위한 중층적 협의들로 평가된다.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일본의 입장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앞서 언급한 아시아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기구들 중 APT와 EAS의 형성에 대해 간단히 논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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