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징병제도에 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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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독일의 징병제도에 대한 논의
I. 서 론
20세기는 종종전쟁의 세기이라 일컫는다. 두개의 대전은 미증유의 규모의 파괴를 가져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산업 혁명 이후의 경제력과 기술력 발전과 함께 징집 군대였다. 징병 군대는 전쟁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또, 그 대규모로 비참한 전쟁은, 징병제 자체의 변용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징병제는 개인과 국가가 직접 대치하는 계기이다. 국가는 개개인에 대해서, 몸을 물리적으로 붙잡고 생명마저 국가 때문에 위험에 빠질 것, 나아가서 타인에 대해서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제할 뿐 아니라, 각각의 세계관, 양심에도 개입하기 때문이다. 징병제는 국가가 개개인의 행동·사고 양식까지를 순치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였다. 징병제를 전제로 가능하게 된 총력전 체제는, 사람들의 사회생활 전체를 전쟁 때문에 통제했다. 전후, 징병제는 수정이 불가피하고, 독일에서는 병역 거부권이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되도록 되었다. 게다가 또, 냉전 이후 현재 징병제는 새로운 기로에 직면하고 있다. 동서 독일에서는 당초보다 징병제에서 일탈인 병역 거부자에 배려한 제도가 도입되어 각각의 국가에서 병역 거부자는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본 보고서에서는 국가가 얼마나 개인을 국민으로 포섭하려 했는지 하는 시점에서, 독일에서의 징병제의 변용을 개관하다
II. 개인의 국가의 혼잡
1. 징병제에 의한 국민화
현재 같은 징병제는 근대 국민국가 성립에 따른 확립했지만, 군역의 역사는 초기 중세까지 올라갈 수 있다. 초기 중세 시대에는, 안전 보장이란 스스로가 거주하는 마을을 공동으로 방어하는, 자위적이었다. 도적에 습격당한 경우 등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의 평화를 협력하고 지키는 책무가 있다고 여겨졌지만 점차 공동체적인 관념은 희미해져, 14세기경에는 안전보장은 동료들끼리 서로부터 지배자의 강제로 변화했다. 습격이 있을 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의사에 의해서 싸우는 군대가 되었다. 봉건시대에는 영주는 자신의 영토를 방위 혹은 확대하기 위해서 전투 프로인 용병을 사용했다. 요즘은 무기의 발달에 따른 전장에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게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병은 비용이 걸리는 데에, 용병들은 실직하지 않기 위해서 고의로 전투를 끌거나 주민으로부터 약탈하거나 반란할 수도 있었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침략하는 위협을 느낀 영주들은, 값싸고 신뢰할 수 있는 군대를 원했다. 그 때문에, 주민을 방위 때문에 조직화한다는 발상이 등장했다. 다만 모든 주민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재산과 직업을 가진 시민이 군사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방위를 담당해야 할 대상이 한정된 데는, 귀족들이 농민을 무장시키는 데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는 측면도 있었다. 1654년 제국의회에서 상비군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장교양성을 위한 군사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병졸을 훈련을 위해서는 연병장이 만들어졌다. 병사한 사람들은 병영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는 것이 요구됐다. 그들은 지급된 제복을 입는다, 사용하다, 규율 바른 행진해야 했다. 군대 내에 머무르지 않고 공장이나 학교에서도, 규율·훈련으로 사람들의 신체의 운용에 대한 단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국민의 생활, 행동 양식이 규격화되기 시작했다. 또 국민은 봉건사회에는 강한 신분차별과 지방 분산성이 약해져, 균질화가 진행되었다.
1733년 캔턴 제도가 시행되어 징병제가 도입된)전국을 500가구로 구성된 징병구(Kanton)으로 나누어 징집된 주민은 병사로서 2년 군사 훈련을 받고, 1년 중 3개월(후에 2개월 동안 1개월 반에)교련을 받지만, 나머지는 농촌에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다 또, 미성년자도 연대부에 예비#준비군으로 등록되었다. 이 제도의 농촌에서의 사회관계에 미친 영향은 막심했다. 일단 징병되거나 등록된 젊은이는 농촌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농사에 종사하지만, 그 사이에도 병사인 표시(모자에 달방 등이 그들의 소속 연대를 나타낸)을 차려 입었다. 더 본인뿐 아니라, 가족도 함께 군사 재판권에 속한 것부터, 국가 수준의 재판권이 각각의 농촌에 침투했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들은 종래의 유일한 정부인 귀족의 지배 아래 있다고 생각하지 않다. 그들은 각 지방에 있으면서, 중앙의 국가에 속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다수의 령방이 혼재하는 상태에 있던 독일에서, 사람들에 하나의 독일 민족이며,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각을 형성하게, 징병제는 크게 기여했다. 다만 실제로는, 귀족, 고급 관리, 대학 교사, 토지 소유자는 이 의무를 반드시 제외됐다. 그 외에도 많은 관리나 연금 생활자의 아들, 일정한 지불을 하는 상인 공장주는 면제되었다. 또, 모직물·비단 산업·광업·해운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정 조건 하에서 면제되어 있으며 이 시기의 징병제는 모든 주민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말 계몽주의는, 징병제가 초래한다고 여겨졌다, 사회에 대한 민주적 평화적 효과에 기기다려 지는 곳이 있었다. 국가 때문에 군역을 담당함으로써 국민의 권리를 얻는 것이며, 즉 병역으로 가는 것은 민주 국가 국민의 권리이라는 이념이다. 복종할 만한 인민의 국민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1800년대에 시작된 프로이센 군 개혁부터 60년 남짓 사이에 독일 국민에게 징병제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징병제에 대한 신앙은 전통적인 종교보다 깊은 의미에서 수용되고 있었다. 이 신앙을 허용하지 않을 것은 독일인이 아니다며는 정도였다라는 지적이 있듯이, Optiz, S.22.
물리적인 역무의 강제만 아니라, 국민이 되는 것 대신, 개개인의 내면에 대한 국가의 관리가 강화된 것이었다.
2. 총력전체제
나폴레옹에 대한 조국 해방 전쟁선전 포고로 연결시키고, 1813년 3월 17일에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세세는 우리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요청을 실시하고, 이에 따라조국 방위를 위한 대량 징 모의 군대가 편성된다. 프로이센 군대는 애국주의적 열정에 넘쳤다. 학생과 시민의 자제와 수공업 노동자들이 우리 편 군대에 참가했다. 그 후, 군대 밖에서도, 사람들의 대대적인 모금 활동이 이루어지거나 애국주의 협회와, 걸리고는 최초의 자립적인 여성 협회도 만들어졌다. 거의 모든 주민들 계층이 이 전쟁에 관계된 상태였다(단 48쪽). 1866년경까지는, 프로이센에서는 높은 동기화되어 정치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대중 군이 달성되었다. 성인 남자의 대부분은 항상적으로 군대적 질서 밑에 편성되었다. 그들은 독립된 개인이기 전에 국왕의 병사인야 하지 않았다. 또, 요즘에는 군사 기술의 발달에 따른 무기의 성능이 향상되고 비거리가 늘어나면서, 밀집하고 치러졌던 전장은 분산할 수밖에 없었다. 상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탈주하지 않고 명령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갈수록 병사의 애국적인 교육이 중시되게 되었다. 즉, 국민은 신체적 물리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고 개개인의 내면에도 국가의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두 세계 대전은 모든 교전국이 징병제에 기초한 대량의 병력을 동원해서 치고받는 소모전이 되었다. 또, 대량의 중화기와 전차, 전함, 비행기를 투입하는 전투가 길어지는 가운데, 산업과 국민을 총 동원했다총력전이라는 새로운 전투 방식이 등장했다. 제일차 대전 기간에, 주요국에서는 30~60%의 성인 남자(독일에서는 성인 남자의 66%)이 동원됨에 미쳤다. 전면전에 대해서는, 징집하는 남성에 그치지 않고 예비 노동력인 여성의 동원, 모든 소비재와 식량도 철저히 통제에 놓였다. 세계 대전의, 사람들에게 군사적 지배가 한층 더 진행될 것이다. 수백만명의 동원, 참호전, 전선에서의 생활은, 장교-사병 간의 동질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사회의 평등화라는 변화에 연결되어 갔다. 사회적 평등의 제도화도, 국민 개개인의 국가로의 통합을 강화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렇듯 근대 국민 국가는, 직접 전투를 치르고 군인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모조리 전쟁에 끌어넣었다. 이제 국가가 국민의 번식, 탄생, 사망, 건강, 수명까지 적극적으로 조정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그 극단적인 예를 제일차 대전 이후 나치 독일의 우생학의 사고방식으로 볼 수 있다. 1920년대에는 고명한 법학자와 정신 의학자가 『생존 무가치한 생명의 말살의 허용』에서, 불치의 백치의 안락사를 긍정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다음 글이 그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수많은 귀중한 젊은이가 전장에서 목숨을 없애고, 수백 씩의 부지런한 탄광 노동자가 폭발 사고로 생매장이 되어 있는 한편, 정신 병원에서 입원 환자가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다. 즉, 가장 유용한 인재가 희생됐고, 이제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 제멋대로 보살피다 병기되고 있는 것이다. Karl Binding und Alfred Hoche, Die Freigabe der Vernichtung lebensunwerten Lebens. Ihr Mas und Ihre Form, 2te Aufl., Meiner, Leipzig, 1920, S.55 (小 32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