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론] 부시가 지적한 얄타체제의 문제점과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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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론] 부시가 지적한 얄타체제의 문제점과 허구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얄타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수뇌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행한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전쟁수행과 전후처리문제, 국제연합창설 등에 관한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독일에 관해서는 분할점령, 비무장화, 전쟁범죄자의 처리 등이 확인되었고, 폴란드에 관해서는 신정부 수립을 소련이 지지하는 루블린 소재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와 영국․미국이 지지하는 런던 망명정부의 교섭에 맡기기로 하였다. 또한 소련의 대일참전〈對日參戰〉에 관한 비밀협정도 체결되었는데, 거기서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가하는 대가로 사할린〈樺太〉, 치시마열도〈千島列島〉를 획득하고 일본의 보유지처리와 관련하여 다롄항〈大連港〉의 국제화〈國際化〉, 소련의 뤼순〈旅順〉 조차권회복〈租借權回復〉의 회복, 만주철도의 중소〈中蘇〉공동운영 등의 권익〈權益〉을 보장받았다. 이에 따라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흔히들 얄타 체제라고 부른다. 1946년 이 협정 내용이 밝혀지자 미국에서는 루스벨트의 대소〈對蘇〉타협이라 하여 비난의 소리가 높았고 얄타회담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살펴보자.
발트해 연안에 있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발트 3국이라고 부른다. 이들 3개국은 과거부터 인접한 러시아와 악연을 맺어왔다. 해상 교통로와 부동항을 원했던 러시아는 항상 발트 3국을 자국의 발아래 두기를 원했다. 현대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몰로포트-리벤트로프 협정에 따라 소련이 발트 3국을 병합한 것이다. 이 협정은 독일과 소련이 1939년 8월 상호 침공하지 않는 대신 동유럽을 분할 점령키로 합의한 비밀 조약이다. 이 협정은 요하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과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인민위원회 의장(총리) 겸 외무인민위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양국은 이 협정을 통해 폴란드를 분할하고 발트 3국을 소련에 넘겨주기로 합의했으며, 이에 따라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7일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방문했다. 부시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2차 대전 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약소국들의 운명을 갈랐던 얄타협정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미국의 책임도 인정했다. 부시 대통령은 “얄타 협정은 수 백 만 명의 유럽인들을 스탈린 공산당 지배 하에 희생시킨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의‘불의〈不義〉한 전통’을 답습했다”며 “약소국의 자유가 다시 한번 강대국간 협상의 소모품으로 희생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시의 연설은 얄타 협정도 몰로포트-리벤트로프 협정과 마찬가지로 소련에게 동유럽 지배권을 넘겼고, 그 결과 스탈린의 독재 체제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박탈되고 수많은 유럽인들이 폭정에서 신음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시가 얄타협정을 비판한 장소인 라트비아는 공교롭게도 한때 미국의 대 소련 전초기지였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 소비예트 공산 정권이 세워지자 당시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그러나 소련을 관찰할 필요를 느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총영사관을 세우고 엘리트 외교관들을 파견했다. 당시 외교관들 중에는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유명한 조지 케넌 전 소련주재 미국대사가 있었다.
케넌 등은 소련이 표방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 세계의 공산화를 추구하는 것인 만큼 미국은 대결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을 성안하고 지지한 당시 외교관들을‘리가학파’라고 부른다.
1930년대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유럽에서 세력을 넓히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옴에 따라 미국은 1933년 소련과 수교하고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 소련과의 협력은 강조될 수밖에 없었고 얄타협정까지 맺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과의 협력을 강조한 세력은‘dif타학파’라고 불렸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얄타학파의 영향력은 유지됐으나 이후 국제질서는 냉전체제로 바뀌었고 소련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한 리가학파가 득세했고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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