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작가론]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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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작가론] 열하일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序

2.本論

2.1 열하일기 서사적 구성

2.2 열하일기 표현방식과 의도

2.3 문체반정의 중심이 된 열하일기

3.結

4.參考文獻
본문내용
1.序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이 살았던 시대는 병자호란과 정유재란을 거쳐 만주족이 권세를 틀어쥐고 있던 청나라에 굴복하게 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내로는 여전히 자주국가임을 인지하면서도 형식상으로는 황명과 다름없는 사대의 예를 청나라를 향해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대의 형식적 절차의 하나가 바로 사대 사행(使行)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 보면 병자호란이 끝나고 당시 인조 15년 청태종이 용골대를 시켜 정식국교를 개시한 이래 삼절(三節) 이외에도 연공사(年貢使) 등에도 여려 명목의 사행이 있어 이것을 통하여 중국과 접촉하여 왔다.
이렇듯 청나라에 대한 사행을 흔히 「燕行」이라고 속칭하고, 이는 이전 명나라의 사행이 「朝天」이라 불린것과 그 어미가 대조적이다. 또한 그 내용조차 명나라의 조천과는 판이하다는 데서 주체성을 추구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연행록들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10개에 달한다. 이 중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김창업,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유득공 등의 것이 있다.(이들은 흔히 백탑 십파라고 불리우는 그룹이다.) 이 중 우리가 연구해 볼 박지원의 「熱河日記」는 내용에 있어 관찰의 예리한 기술과, 식견의 규모가 다른 것들에 비해 특히 뛰어나고 그 보급도 연행록 하면 이 책이 떠오르듯, 매우 넓다. 그 뿐 만이 아니라 열하일기는 저자의 생존 당시에 있어 다른 어느 것보다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열하일기의 영향을 가장 중요한 「조선사상사」의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연암 박지원(1737~1805)가 청나라로 입연한 것은 정조 4년으로 이때 연암의 나이는 44세였다. 자기의 문생인 이덕무돠 박제가가 다 같이 정조 2년에 입연하였고 그가 선배로 사귄 홍대용이 영조 42년에 이미 청나라에 들어가 있어, 북학론자인 그들로부터 중국의 여러 모습에 대해 듣게 되었을 그는 큰 탐구심을 가지고 종형인 박명원의 사행에 동참하여 갔던 것이다.
종복에게까지 중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오겠다는 의지를 보인 연암은, 수레,도로,주거,농제 등 우리 실생활에 가장 근접한 관찰과 청나라의 통치제도와 방책, 만주족 통치아래의 한(漢 )인 사대부의 동향 등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탐구했다. 이러한 그의 관찰은 각각의 사실을 자세히 아는 것에 주력했을 뿐 아니라, 항시 그 각각의 사실들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큰 숲을 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늘 고국의 입장을 명백히 전제하고 연구하였다. 비록 그가 청나라에서 만난 사람들이 박제가,이덕무 혹은 유득공처럼 당대 명사는 아니었더라도 오히려 일반적 조류를 붙잡는데는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타 연행록 보다 뛰어난 점이 오히려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민두기,1963,「열하일기의 일연구」,『역사학보』vol20,역사학회,82p 참조


그의 행로는 의주에서 북경까지의 여행로와 북경에서 열하에 까지 미치고 있고 그의 교우는 열하에서의 숙소인 태견학에서 만난 사대부와 만주횡단경로에서 만난 그 밖에 약간의 상인 수재들과 농민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이와 같이 중국 일대를 둘러보며 경제적 발달상에 중심을 두어 다른 연행록들 보다 더욱 인상적이고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중국의 번영상에 조선의 낙후된 경제현실을 수시로 대비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벽돌과 수레의 사용, 적극적인 해외 통상, 목축업의 장려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청나라의 경제발전에 대한 치밀한 연구에 기초하여 당시 조선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있는 점이 이 열하일기의 큰 특징이다. 또한 전반적 청나라의 문화가 명나라의 잔재를 거부하고 호속을 강권하여 점점 우리나라와는 풍속이 달라지고, 오히려 우리 나라의 한족식 복식잔재를 보고 조소하는 부분이 나와있다. 이를 통해 박지원은 서글퍼하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그들의 내부에도 이 호속에 반발함이 있음을 박지원은 특유의 예리한 시각으로 놓치지 않는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의관제도에 대한 자부심이 딱히 근거 없는 면이라는 점을 꼬집고 있다.
이렇듯 중국여행에서 한인, 만인,몽고인,아랍인 등 여러 민족의 이색적 풍속을 접한 연암은, 우리나라 전통 사대부와는 달리 풍속의 상대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저서에서 강조하는 열린 태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연암이 주자학적 전통 입장을 떠나지는 않고 그 제도권 안에서 있으면서도, 고증학이나 양명학, 나아가서는 서학과 같은 이단 사조에 대해서까지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명호,1988,「연행록의 전통과 열하일기」,『한국한문학연구』vol11.한국한문학회,45쪽 참조

열하일기의 세부적인 목차는 이렇다.(기행을 중심으로) 권순긍,-,『새로운 시대를 향한 유쾌한 여정,p44~45 인용

6월 24일~7월 9일:압록강~ 요양
7월 10일~7월 14일:십리하~ 소흑산
7월 15일~ 7월 23일:신광녕~ 산해관
7월 24일~ 8월 4일:산해관~ 북경
8월 5일 ~ 8월 9일:북경~ 열하
참고문헌
권순긍,-,『새로운 시대를 향한 유쾌한 여정』
김동석,2005,「열하일기의 서사적 구성과 그 특징」,『한국실학연구』vol.9.한국실학학회.
김명호,1988,「연행록의 전통과 열하일기」,『한국한문학연구』vol11.한국한문학회,
김상조.2004.「박지원과 메카트니의 중국인식 비교」,『한국문학과 비평』vol.25.한국문학이론과 비평 학회.
민두기,1963,「열하일기의 일연구」,『역사학보』vol20,역사학회,
박기석.1997.「열하일기를 통해 본 연암의 대청의식과 호질의 주제」,『국어교육』vol.94.한국어교육
학회.
박지원,1974.『연암집』,경인문화사,
최천집,1997,「열하일기의 표현방식과 그 의도」,『문학과 언어』vol.18.문학과 언어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