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과대중문화] 지상파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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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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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Ⅰ. 방송의 개념

(1) 일제강점기시대의 방송

(2) 미군정기의 방송(1945~1948)

(3) 제1공화국 시기의 방송(1948~1954)

(4) 제2공화국 시기의 방송(1954~1961)

(5) 제3․4공화국 시기의 방송

(6) 제5공화국 시기의 방송

(7) 제6공화국 시기의 방송

(8) 문민정부 시기의 방송

Ⅱ-1) 본론(부정적인 측면)

Ⅱ-2) 본론(긍정적인 측면)

1. 무한도전이란?
2. 시청률, 무한도전에 대한 관심
3. 무한도전의 문제점및 단점
4. 무한도전의 장점 및 특징

결론

■나아가야할 방향

■ 올바른 TV시청 10계명-

■나의 TV 시청습관, 점검하기

■TV끄기 동영상

■최종 결론


본문내용
※방송의 역사※

▶한국 방송의 시대적 흐름
역사 연구에서 필수적인 작업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 구분은 방송사 연구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다른 분야사의 시대 구분과 마찬가지로 과정인 역사를 시간적으로 절단할 수 있느냐는 것과 상호 의존적 현상을 하나의 독립된 현상으로 떼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 현상을 일시 정지된 것으로 가정하고 다른 변인들과 절연시켜 시대별로 구분하는 것은 복잡한 현상을 질서정연하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방송 역사를 보다 정확히 설명하기 위한 시대 구분의 기준은 무엇이야 하는가? 그것은 방송 역시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해 왔기 때문에 방송의 흐름을 역사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고 타당하리라고 본다.
(1) 일제강점기시대의 방송

1926년 11월에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설립되고 이듬해인 1927년 2월 16일에 우리나라 최초로 방송 전파를 내보냈다. 이때의 출력은 1㎾였으며 주파수는 약 690㎑, 호출 부호는 ‘JODK'였다. 수신기의 등록과 수신료 제도는 일본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청취료는 2원이었으며, 초기에는 한․일 두 나라 말을 혼합하여 방송하는 방송 체제를 이루고 있었지만, 당시 경성방송국의 편성은 일본 방송의 중계를 전제로 한 편성이었다. 이때 순수한 한국어 방송으로는 창이나 민요, 동화 등이 방송되었고 일본어 방송은 주로 뉴스나 경제 상황 보도 등이었다. 그리고 한․일어 혼합 방송으로는 물가 시세 및 일기 예보, 공지사항 등이었다. 또한 50명의 경성방송국 직원 가운데 한국인은 단 5명뿐이었다. 기술부에 노창성, 한덕봉 등 기술자와 프로그램 담당 최승일, 그리고 여자 아나운서인 이옥경과 마현경이 있었다. 따라서 말이 경성방송국이었지 인원 구성부터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일본 방송국의 중계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일제는 무력에 의한 억압 통치에서 간접적인 문화 통치로 통치 전략을 수정하면서 그 일환으로 한․일 이중 방송 체제를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말 전용 방송의 독립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1932년 4월 7일 경성방송국을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개칭한 것도 그러한 정책 변화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경성방송국의 이중 방송 체제는 한국인의 편리와 필요에서라기보다는 일제의 소위 ‘황국 신민사’, ‘내선 일체’, ‘신전 개발’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고안이라고 하겠다. 단순한 경제적 이유에서만의 수신기 보급이나 한국민의 문화적 필요에 부응한 제도라기보다는 한국인을 상대로 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말 방송이 시작되면서 한국인의 라디오 수신기 보유 대수는 급속히 늘어났다. 1932년 이전까지만 해도 6년 동안 거의 증가 없이 300대에 불과했던 라디오 보유 대수가 이중 방송을 하는 1935년 7월부터는 3,663대라는 무려 12배의 급속한 증가율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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