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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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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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오군란에 관한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임오군란
●배경
●진행
●청과 일본의 개입
●결과 및 평가
본문내용
●청과 일본의 개입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마침 임오군란 당일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 어윤중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음력 6월 19일)을 핑계로, 음력 6월 27일에 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이 육로로, 8월 20일(음력 7월 7일)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이 정여창(丁汝昌),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월 25일(음력 7월 12일)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월 29일(음력 7월 16일) 청군은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8월 30일 (음력 7월 17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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