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의 기능과 조선후기 서원의 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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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원의 기능과 조선후기 서원의 폐단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서원의 기능
3. 서원의 폐단
4. 도동서원
5. 맺음말
본문내용
4.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한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보물 350호이다.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서원 중 하나로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서원이다.
도동서원이 위치한 곳은 경상북도 달성군 도동리이다. 서원의 뒤쪽에는 대니산이 자리잡고 있고 앞에는 낙동강이 동북쪽에서 흘러내려 서원이 자리잡은 마을을 끼고 서남쪽으로 휘몰아가고 있다. 강 건너에느 고령군 개진면 일대의 평야가 시야에 들어온다. 서원이 위치한 곳은 도동동 뒷산 기슭의 활같이 휘어져 돌출된 구릉으로서 터전은 평지와 같이 다듬어졌으나 건물은 지형 때문에 경사지에 전체적으로 북향으로 놓였으며 배산임수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도동서원은 1568년 선조 1년에, 고을의 선비들이 서원의 건립을 추진할 때, 전국각지의 선비들이 적극지원하여 만들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때 왜군의 방화로 불탔을 때 서원을 다시 짓고 나라에 사액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도동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는데, 이 글씨는 명칠 한석봉이 쓴 것이다.
1626년 인조 4년에는 서원앞 서쪽 언덕에 신도비가 세워졌고, 1678년 숙종 4년에는 서원경영에 남다른 공적을 쌓고 한훤당의 문집을 편찬하는 것에 힘쓴 정구의 위패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도동서원의 중앙에 설치된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교육 공간의 입구인 환주문에 도달한다. 환주문 정면으로 마당 건너에 정면 5칸의 강당이 있는데 ‘중정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마당 좌우에는 서로 마주 보며 동, 서재의 재실이 있는데 거인재, 거의재라 하였다. 강당 왼쪽 모퉁이에는 정면 2칸의 장판각이 있고, 오른쪽에는 따로 담장이 둘려진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다.강당 뒤로 계단을 다시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이 나타난다.
서원의 건물들은 기능에 따라 진입 공간, 교육공간, 제향공간 그리고 부대시설의 네 영역으로 나누어졌는데 모두 담장에 의해 구획되어 있다. 일직선의 중심축 선상에 주요건물을 배치하여 기능에 따라 공간을 분화시킨 배치구도와 자연의 지형,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의 위계 질서를 잡고자 한 도동서원은 전형적인 서원의 건축구조를 보여준다.
도동서원에 모셔진 김굉필은 평생토록 주자의 을 잃고 실천하여 소학동자로 자처하였다. 일찍히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공부에 전혁하는 한편 교육에만 힘썼다. 41세때 주위의 천거로 남부참봉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을 지냈다. 김굉필은 도학을 일으켜 후생을 바로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소문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마을의 집집마다 학도들로 가득차 있었고, 자리가 비좁아서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귀양지까지 배움을 청하러 왔으며 그의 수제자인 조광조는 평안도 회천까지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5. 맺음말

결국 서원이 원래의 기능인 유교적 덕목을 지닌 학자의 양성과 같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
참고문헌
최완기, 『한국의 서원』, 대원사, 1991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문화재관리국, 『도동서원』,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