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학] 쌍봉사에 관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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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학] 쌍봉사에 관한 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

-(화순 쌍봉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화순 쌍봉사 극락전)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아미타불여래좌상)

-(화순 쌍봉사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상 일괄)
본문내용
-(철감선사탑비)
이 탑비는 현재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으며 비신은 유실되었고 신라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한 철감선사의 행장을 기록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마을에 전해지고 있는 구전에 의하면 이 비는 일제시대 일인들의 손에 의해 비신이 없어졌고 탑비 부근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비신(碑身)이 없어서 그의 행적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조당집'이나 사자산문을 개창한 징효대사(절중(折中),825 ~900) 보인탑비 등에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선사는 신라 원성왕 14년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하여 김제 비귀신사
지금의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을 읽으면서 수학하다가 헌덕왕 17년(825)에 입서 하였다.
그는 남전보원(748~834)의 심인을 전승받아 그 후 문성왕 9년(847)에 굴산사를 개창했던 범일선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풍악 장담사에 머무르면서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케 하고 징효대사에게 불법을 잇게 하여 강원도 영월지역에서 개창한 사자산문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또한 선사는 말년에 주석한 쌍봉사를 중창하였으며 이곳에서 경문왕 8년(868) 4월 18일에 입적하였다. 왕은 시호를 철감(澈鑒), 탑명(塔名)을 징소(澄昭)라 하사하였다. 비신의 기록을 볼 수 없어서 이처럼 간단한 내용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