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역사답사] 제주 역사문화 기행(제주성지와 제주 목관아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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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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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답사 개요

1. 제주 성지

2. 濟州牧官衙址

Ⅱ. 답사 경위

Ⅲ. 제주지역 문화재의 복원과 의미 (제주성지와 목관아지를 중심으로)
본문내용
2. 濟州牧官衙址
지정 내용 :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380호
소재지 : 제주시 삼도2동 43-3외 23필지
지정일: 1993년 3월 31일
제주시 삼도 2동 43-3번지 외 23필지에 위치한 유적으로 사적 제380호(1993년 3월 31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1416년(태종 16) 제주도가 三邑(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나누어지기 이전, 이곳은 탐라국의 관아터였을 뿐만 아니라, 탐라국이 고려의 지방행정구획으로 편입된 후에는 大村縣의 중심지역이었다.
1435년(세종 17) 최해산 목사는 제주목 관아건물이 모두 불에 타 버리자, 營廳인 弘化閣을 건립하면서 種樓, 침실, 욕실, 독서방, 琴堂, 政堂, 藥庫, 纛所, 廊舍, 營庫 등 모두 206칸의 관아 건물을 새롭게 시설하였다. 이때 특히 후일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관아건물이 서로 닿지 않도록 건축하였고, 또 담장을 쌓았다.
제주목의 관아시설은 관덕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치중되어 있었다. 특히 좌측인 북쪽(현 사적지 일대)에는 목사의 동헌과 관아시설, 우측인 남쪽에는(현 제주대학병원 일대) 판관과 관련된 관아시설이 편중되어 있었다. 주요시설들을 보면, 闕牌와 殿牌를 모셔 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向闕望拜를 하던 영주관(객사)을 중심으로 營廳인 홍화각, 제주목사의 동헌인 연희각, 동헌의 외대문인 종루, 망경루․애매헌․귤림당, 그리고 판관의 동헌인 찬주헌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이외에 목사․판관의 사적인 공간인 內衙가 있으며, 좌수․별감이 집무하던 향청, 육방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作廳, 군장교의 將廳, 회계사무를 관장하던 公須廳, 죄인을 가두는 獄, 노복들의 거처인 관노방 등 많은 관아시설이 위치해 있었다.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1991년 이후 계속된 발굴 결과, 관아시설물군은 크게 세 번에 걸쳐 건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주초석, 그리고 ‘施主萬戶’․‘牧使’․‘郭支村’․‘千戶 夫承碩’ 등의 명문 기와, 분청사기편, ‘左’․‘官上’,․‘上衙’ 등이 명문된 백자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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