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만물관(萬物觀) - 그 법칙과 생명

 1  유교의 만물관(萬物觀) - 그 법칙과 생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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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교의 만물관(萬物觀) - 그 법칙과 생명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천지(天地)’ ‘만물(萬物)’론의 등장

2. 「맹자(孟子)」의 애물(愛物)과 「순자(荀子)」의 리물(理物)

3. 「역전(易傳)」에서의 유기체(有機體)적 만물관(萬物觀)

4. 한대(漢代) 유교(儒敎)의 만물상응론(萬物相應論)

5. 송대(宋代) 리학(理學)의 만물일체론(萬物一體論)

6. 맺는 말 - 만물(萬物)에 대한 ‘경(敬)’
본문내용
1. ‘천지(天地)’ ‘만물(萬物)’론의 등장
‘천지’ ‘만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경전은 전국(戰國) 시대에 이루어진 「맹자(孟子)」「순자(荀子)」「역전(易傳)」「예기(禮記)」등이다. 「논어(論語)」에는 ‘천(天)’과 ‘인(人)’이라는 용어는 많으나 ‘천지(天地)’ ‘만물(萬物)’은 보이지 않는다. 「주역」의 경문(經文)인 괘효사(卦爻辭)에도 ‘천지(天地)’ ‘만물(萬物)’이 없다. 유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이 두 경전에서 천지(天地) 만물(萬物)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기본 시각을 시사한다.
공자는 자연의 세계에 대하여 인간 사회에 대한 것만큼의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훗날 자연세계를 의미하게 된 ‘천(天)’이라는 용어를 공자가 즐겨 사용하지만, 공자의 ‘천(天)’은 아직 인격적 주재자의 요소가 남아 있었고, 또 주로 도덕적 가치의 근거로서 활용되었다. 천(天)에 대한 언급이 거의 언제나 인간 사회에서 요청되는 덕목과 관련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이념이었고 정신의 경계였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유가는 천(天)이라는 용어 외에 천지(天地)라는 용어의 사용빈도가 높아지고 ‘물(物)’과 함께 다시 ‘만물(萬物)’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맹자를 비롯한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들을 제외하는 여타의 유가들 -예를 들면 「역전(易傳 )」, 「예기(禮記)」의 저자나 순자(荀子) 등 -은 이전의 유가들과는 달리 천관(天觀)에 있어 상당한 정도의 변화를 보인다.
천(天)이라고 할 때는 주로 그 상대 개념이 인(人) 또는 물(物)이었다. 인(人)과 대비될 때의 천(天)은 주로 인간사(人間事)를 주재하는 절대적 힘의 원천, 가치의 표준을 의미하였다. 물(物)과 관계할 때의 천(天)은 물(物)의 산출자, 조물자였다. ‘물(物)’이라는 용어는, 「순자(荀子)」에 따르면, 대공명(大共名)이지만 그러나 「순자(荀子)」 이전까지의 물(物)은 포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별적 존재를 의미한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그러나 만물(萬物)이라는 용어는 물(物)에 비하여 보다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처음부터 지니고 있다. ‘만물(萬物)’은 ‘천지(天地)’의 상대개념으로 양자는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이제 유가에 있어서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은 전국시대 이후에 유가 철학계의 쟁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교 경전과는 달리 「노자(老子)」와 「장자(壯子)」에는 ‘천지(天地)’ ‘만물(萬物)’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며, 이에 대한 철학적 사색의 흔적이 뚜렷하다. 도가는 자연 현상을 귀천으로 나눌 수 없으며, 나아가 인간사회의 윤리적 기준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자연에 관한 객관적 이해로서의 과학은 가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오늘날의 일반화된 생각을 고대의 도가사상가들은 이미 지니고 있었다. 도가사상은 한․당대(漢․唐代)에 이르러 적어도 유사과학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지만 유가로부터는 상당한 시간이 흐르기까지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유가는 여전히 사회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써 자연을 해명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자연의 물상은 거의 언제나 인간사회의 가치나 질서를 위한 비유로서 등장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서 이해되고 탐구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