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연극과영화] 일본과 일본 영화(3명의 감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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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연극과영화] 일본과 일본 영화(3명의 감독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감독의 작품

역대 걸작

《소나티네》(1993),

《하나비》(1997)

추구하고자 한 영화 세계 - 특징 소개



생애

감독의 작품

역대 걸작

미조구찌 켄지의 사람들

미조구찌 켄지의 작풍

수상내역



감독 소개

감독의 작품

역대 걸작

특징 소개

본문내용
도쿄도 동부에 위치한 台東区(타이토우쿠)浅草(아사쿠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러일전쟁 때 군인용 우의를 제작하는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그다지 번성하지 못한 소상인이었기 때문에 유소년시절부터 갖은 고난을 맛보게 된다. 가난했던 집안사정상 중학교에 진학을 할 수 없었고 누나의 도움을 받아 서양화를 전문으로 하는 사설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된다. 졸업 후, 1918년에 코베시의 우신일보사에서 광고도안담당으로서 취직을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된다. 도쿄에서 태어나 줄곧 도쿄에서 생활했던 청년 미조구찌에게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유서 깊은 관서지방에서 생활한 기억은 훗날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때로는 명확하게, 때로는 어렴풋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렇다 할 뚜렷한 직장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다시 도쿄에 있는 누나의 집으로 돌아와 칩거를 하는 동안, 오페라, 영화, 문학 등에 심취하게 된다. 또한, 여색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는데, 번화가를 다니던 중 어느 샤미센 연주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일본최초의 영화사 日活(닛카쯔)사의 감독인 若山(와카야마)의 조수로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미조구찌의 나이 24세가 되던 해, 日活사에서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나 オヤマ(여자 역을 연기하는 남자배우)들의 다수가 기존의 감독들을 데리고 나가 버리는 일이 발생함에 따라 불과 2년 만에 조수에서 감독으로 승격되는 행운을 얻는다.
1923년 2월 데뷔작인 「愛に甦る日(사랑으로 다시 피어나는 날)」을 비롯해 그 해에만 10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탐정극에서 사실적 묘사에 입각한 표현주의적 작품까지 실로 그 내용이 다양했으며 「敗残の唄は悲し(패잔의 노래는 슬프다)」를 통해 신진감독으로서 인정받기에 이른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영화제작소의 이전(교토)과 1925년 동거녀에게 칼로 등을 찔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얼마간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이듬 해, 복귀하여 번화가의 정서를 밑바탕으로 한 여성극을 발표하고 나서부터는 더욱 더 여성에 대한 감성을 그려내는데 힘을 쏟았다. 1930년 「唐人お吉(당인오키치)」가 호평을 받았으나 이 작품을 제작한 후 군국주의의 압력은 한층 심화되어 ‘프롤레타리아트’에 관한 영화는 추방되며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비정치적인 이유로 허용된다.
그렇다고 그 자신은 좌익사상에 심취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국책사업이었던 満蒙開拓移民(만주몽고개척이민)의 홍보를 위한 영화 「満蒙建国の黎明(만주몽고 건국의 여명)」을 찍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재빠른 대처를 보이기도 한다.
1933년 日活(닛카쯔)영화사를 나와, 入江たかこ가 운영한 入江프로덕션에서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잇게 된다. 소설가인 泉鏡花(이즈미 쿄우카)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滝の白糸(폭포의 흰 줄기)」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게 된다. 1934년에는 프로야구팀의 구단주이자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永田雅一(나가타 마사이찌)가 설립한 ‘제일영화사’의 영화제작에도 참여하여 山田五十鈴(야마다 이스즈)주연의 「折り鶴お千(종이학오센)」을 비롯해 「浪華非歌(나니와 비가)」, 「祇園の姉妹(기온의 자매)」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명성을 높인다.
제일영화사가 경영악화를 이유로 문을 닫은 후, ‘신흥키네마’를 거쳐 松竹京都撮影所(쇼치쿠쿄토촬영소)로 옮겨 끊임없는 제작활동을 한다. 1941년에서 1942년에 걸쳐 만든 「元禄忠臣蔵(겐로쿠츄신구라)」의 전․후편을 직접 다루었다. 이 작품으로 문부과학성 장관특별상을 받지만 흥행에는 참패를 맛보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민주주의적 색채가 강한 「女性の勝利(여성의 승리)」로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