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 박용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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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용아(龍兒) 박용철에 대하여
1. 생애 및 문단활동
호는 용아(龍兒). 1904년 6월 21일 전남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하고, 얼마 뒤 전학하여 배재학당에 다니다가 1918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또한, 1921년 도쿄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한다. 박용철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 교우관계를 맺은 영랑 김윤식에 의해 시를 쓸 것을 권유받은 것을 동기로 하여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하여 시 떠나가는 배, 싸늘한 이마, 비 내리는 밤,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시문학』에 이어 『문예월간』을, 1934년 『문학』을 잇달아 발간하여, 당시 계급문학의 이데올로기와 모더니즘의 경박한 기교에 반발하며 문학의 순수성 추구를 표방했다. 이후 그는 시 창작보다는 번역에 주력했으며, 평론가로도 활약했다. 실러의 시 헥토르의 이별, 하이네의 시 내 눈물에서는 등을 『시문학』에 번역해 실었으며, 해외문학파와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서 인형의 집, 바보, 베니스의 상인 등의 희곡도 번역한 바 있다.
그의 평론으로는 임화김기림과 세칭 기교주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을해시단총평(1935), 기교주의설의 허망(1936) 등이 있고, 이밖에도 효과주의적 비평 논강(1931), 그의 시론의 근원을 보여주는 시적 변용으로(1938) 등의 평문이 있다. 특히 시적 변용으로는 시가 단순한 목적이나 기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온갖 체험들을 시인이 자신의 피 속에 용해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시문학파를 당대의 다른 유파와 구별짓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이 글은 또한 시 창작 과정에 대한 매우 정치한 이론화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박용철 사후 1939년에는 전2권의 『박용철 전집』이 간행되었다
1930년대 벽두에 나타나 형형한 빛을 뿌리던 《시문학》은 1931년 10월에 3호로 종간된다. 박용철은 다시 사재私財를 털어 같은 해 10월 ≪문예월간≫을 창간한다. ≪문예월간≫은 ≪시문학≫의 연장선에 있으나 소설 영화 등으로 장르의 폭을 넓히고 괴테 사후 100주년 특집을 다루는 등 해외 문학에 지면을 할애한다. 박용철은 이 ≪문예월간≫ 창간호에 실은 「효과주의적 비평 논강」에서 형식을 등한시하는 계급주의 문학을 비판하고, 비평가의 직능과 자신이 세운 비평의 열두 가지 강령에 맞추어 작품의 효과를 분석한다. 같은 해 12월 그는 에 「1931년 시단의 회고와 비판(12)」 등을 발표하여 순수 문학 비평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1933년 12월 박용철은 《문학》을 창간하고 여기에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유치환을 끌어들여 시문학파의 건재를 안팎에 알린다. 박용철은 시의 내용이나 지성을 부정하고 ‘광’적인 상태에서 솟아나는 영감과 창작과정을 중요시한 하우스만A.E.Housman의 영향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시론에 몰두한다. 1934년 4월 《문학》3호에 그는 하우스만의 켐브릿지대학 강연 시론을 번역한 「시의 명칭과 성질」을 발표하는데, 이후 한층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펼친다. 이러한 박용철의 시론은 1938년 1월 《삼천리문학》에 발표한 「시적 변용에 대하여」에서 좀 더 체계를 갖춘다.
한편, 연극에도 관심이 많던 박용철은 1931년 결성된 ‘극예술동인회’에 가담하여 활동한다. 1934년 4월 그는 ‘시문학사’와 ‘극예술연구회’의 공동명의로 연극 잡지 《극예술》을 발행하여 여기에 이헌구, 김광섭, 윤백남, 유치환 등의 글을 싣는 한편 직접 공연에 참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남다른 열정으로 문학에 임하던 박용철은 1938년 5월 12일 결핵으로 길지 않은 삶을 마친다.
앞에서 언급한 시 외에도 ,,,,,,,, 등 창작시 90여 편과 수십 편의 비평을 남기고, 70여 편의 독일 시와 2백여 편의영미 시, 1백여 편의 외국 동요 등을 번역한다. 창작집은 죽은 지 1년이 되는 1935년 5월, 가족과 동료에 의해 전 2권의 「박용철 전집」으로 출간된다.
2. 순수시론의 전개양상
박용철의 순수시론은 「영랑에게 보낸 사신」(1929), 「《시문학》 창간에 대하여’(1930)」, 「신미시단의 회고와 비판」(1931) 등에서 볼 수 있는 초기의 소박한 순수시론에서 출발하여, 「을해시단총평」(1935), 「병자시단의 일년성과」(1936), 「기교주의의 허망」(1936), 「시적 변용에 대하여」(1938) 등과 같은 후기의 본격적 순수시론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보면, 그의 순수시론의 전개에 있어 1931년에서 1935년 사이의 공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공백기가 실은 박용철로 하여금 탁월한 시론가로 올라서게 한 수련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시적 한계를 자각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서정시인이 탁월한 비평적 안목을 지닌 시론가로 변신하게 되는 계기가 이 공백기에 마련된 것이다.
1) 전기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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