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 박용철(1904 ~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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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박용철(1904 ~ 1938)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용아(龍兒) 박용철 (1904 ~ 1938)
1. 생애 및 문단활동
박용철은 190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박용철은 어려서부터 두뇌가 매우 명석한 수재형 소년이었다. 용철은 네 살에 이미 한자를 익혔고, 일곱 살 때는 사촌 누이가 한글본을 가르쳐 주자 제자리에서 깨치고는 곧 신소설들을 읽어 냈다 - 「박용철전집」(1939), 말미에 붙인 박용철의 아버님의 말.
후에 그는 1911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하고, 얼마 뒤 전학하여 배재학당에 다니다가 1918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또한, 1921년 도쿄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한다. 박용철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 교우관계를 맺은 영랑 김윤식에 의해 시를 쓸 것을 권유받은 것을 동기로 하여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문학을 하게된 동기는 그의 친구인 영랑 때문인 것 같다. 그가 학교에서 수재로 수리에서 천재적이라고 학교 교사의 칭찬이 대단할 때 그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들인 이가 바로 영랑이었다. 는 말을 그 자신이 입버릇처럼 하였다는데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우리시대 시문학의 공간적 위상」(2007)
1930년 3월, 그는 자비로 ≪시문학≫ 박용철을 발행인으로 창간. 1930년 3월 1호를 시작으로 1931년 10월 3호로 끝났다. ≪시문학≫은 시문학파의 문학적 경향과 성격을 대변하는 순수 시문예지로서 1930년대를 연 한국현대시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을 창간하고 여기에 시 , , 등을 발표하여 출판인이자 문인으로 1930년대를 맞는다. 그러나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김영랑이나 정지용과는 달리 박용철은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자신의 시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이론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1930년대 벽두에 나타나 형형한 빛을 뿌리던 《시문학》은 1931년 10월에 3호로 종간된다. 박용철은 다시 사재私財를 털어 같은 해 10월 ≪문예월간≫을 창간한다. ≪문예월간≫은 ≪시문학≫의 연장선에 있으나 소설 영화 등으로 장르의 폭을 넓히고 괴테 사후 100주년 특집을 다루는 등 해외 문학에 지면을 할애한다. 박용철은 이 ≪문예월간≫ 창간호에 실은 「효과주의적 비평 논강」에서 형식을 등한시하는 계급주의 문학을 비판하고, 비평가의 직능과 자신이 세운 비평의 열두 가지 강령에 맞추어 작품의 효과를 분석한다. 같은 해 12월 그는 에 「1931년 시단의 회고와 비판(12)」 등을 발표하여 순수 문학 비평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1933년 12월 박용철은 《문학》을 창간하고 여기에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유치환을 끌어들여 시문학파의 건재를 안팎에 알린다. 박용철은 시의 내용이나 지성을 부정하고 ‘광’적인 상태에서 솟아나는 영감과 창작과정을 중요시한 하우스만A.E.Housman의 영향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시론에 몰두한다. 1934년 4월 《문학》3호에 그는 하우스만의 켐브릿지대학 강연 시론을 번역한 「시의 명칭과 성질」을 발표하는데, 이후 한층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펼친다. 이러한 박용철의 시론은 1938년 1월 《삼천리문학》에 발표한 「시적 변용에 대하여」에서 좀 더 체계를 갖춘다.
한편, 연극에도 관심이 많던 박용철은 1931년 결성된 ‘극예술동인회’에 가담하여 활동한다. 1934년 4월 그는 ‘시문학사’와 ‘극예술연구회’의 공동명의로 연극 잡지 《극예술》을 발행하여 여기에 이헌구, 김광섭, 윤백남, 유치환 등의 글을 싣는 한편 직접 공연에 참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남다른 열정으로 문학에 임하던 박용철은 1938년 5월 12일 결핵으로 길지 않은 삶을 마친다.
앞에서 언급한 시 외에도 ,,,,,,,, 등 창작시 90여 편과 수십 편의 비평을 남기고, 70여 편의 독일 시와 2백여 편의영미 시, 1백여 편의 외국 동요 등을 번역한다. 창작집은 죽은 지 1년이 되는 1935년 5월, 가족과 동료에 의해 전 2권의 「박용철 전집」으로 출간된다.
2. 순수시론의 전개양상
박용철의 순수시론은 「영랑에게 보낸 사신」(1929), 「《시문학》 창간에 대하여’(1930)」, 「신미시단의 회고와 비판」(1931) 등에서 볼 수 있는 초기의 소박한 순수시론에서 출발하여, 「을해시단총평」(1935), 「병자시단의 일년성과」(1936), 「기교주의의 허망」(1936), 「시적 변용에 대하여」(1938) 등과 같은 후기의 본격적 순수시론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보면, 그의 순수시론의 전개에 있어 1931년에서 1935년 사이의 공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공백기가 실은 박용철로 하여금 탁월한 시론가로 올라서게 한 수련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시적 한계를 자각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서정시인이 탁월한 비평적 안목을 지닌 시론가로 변신하게 되는 계기가 이 공백기에 마련된 것이다.
1) 전기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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