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직접투자] 미원 인도네시아 현지화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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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외직접투자] 미원 인도네시아 현지화전략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1. (주)미원 소개
2. 미원 인도네시아 진출 배경과 인도네시아 투자환경


Ⅱ. 본 론

1. 미원의 인도네시아 진출과 선발기업과의 경쟁
2. 미원의 인도네시아 현지화 성공 전략


Ⅲ. 결 론

1.미원의 인도네시아에 진출에 대한 고찰
2. 미원의 인도네시아 도전
본문내용
Ⅰ. 서 론
1. (주)미원
(1) 미원의 탄생과 (주)미원의 성장
우리 민족의 아픔인 6.25전쟁이 끝나고 복구산업이 시작될 무렵 외국의 새로운 상품들이 물 밀 듯이 몰려 들어왔다. 특히 창업자인 임대홍 회장은 일본상품들이 한국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는데 심한 민족적 반감을 느꼈다. 그 중에서도 일제 조미료ꡐ아지노모토ꡑ는 경쟁상대 없이 우리나라에서 판을 치고 있었다. 또 가격이 비싸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내는 고가품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그는 조미료를 직접 만들기로 작정하고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1년여의 온갖 노력 끝에 조미료 제조공정을 익히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1956년 1월, 1백50평 규모의 조그만 조미료 공장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조미료 공장인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미원의 전신)다. 그러던 중 (주)미원이 1963년 발효공법으로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여 ꡐ맛의 혁명ꡑ 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일반주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후 미원은 해를 거듭할수록 하나씩 기업형태를 갖추며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는 인도네시아에 진출, 주력사인 ꡐ미원인도네시아ꡑ를 비롯 6개 계열사를 거느린 ꡐ제2의 미원그룹ꡑ으로 탄탄하게 성장시켰다. 이어 베트남과 중국 등지에 진출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도 제품을 수출, 호평을 받았다.
미원의 전신은 1956년 1월 동아화성공업(주)으로 출발하여, 1959년 미왕산업사를 설립하였다. 1962년 발효법에 의한 조미료(MSG) 생산기술을 개발하고, 동아화성공업주(주)의 상호를 미원(주)으로 변경하였다. 1965년 미왕산업사의 상호를 서울미원(주)으로 변경하고 1967년 발효조미료 미원의 KS(한국산업규격)마크를 획득하였으며, 1970년 미원(주)과 서울미원(주)을 기업공개하였다.
1984년 여의도 대상빌딩을 준공하고 1988년 미원․맛나가 ‘88올림픽 공식 조미료’로 지정되었으며, 1989년에는 종합조미료 6개 전품목에 대하여 KS마크 표시를 획득하였다.
1994년에 그룹 CI작업을 진행하여 계열사명을 미원으로 통일하고, 미원식품(주)의 상호를 세원(주)로 변경하였다. 1997년 대상(大象)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미원(주)과 세원(주)를 합병하여 대상(주)으로 출범하였다.미원은 1998년 21개의 계열사를 가진 대기업이 되었다. 전후 1950년대 중반까지 국내 조미료 시장을 장악했던 아지노모토를 재치고 미원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조미료 산업체가 되었다. 이때 미원은 아지노모토의 신선로 마크와 비슷하게 상표를 제작하여 당시 아지노모토의 항의를 받았으나, 한국정부에서는 근거 없는 항의로 판결하던 전례가 있다. 이후 미원은 발효법에서 기술혁신을 이룩하여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발효조미료 제조업체들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시장 선두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953년 설탕을 주로 생산했던 제일제당이 ‘미풍’이라는 브랜드로 조미료업계에 진출하면서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제일제당은 가격과 경품제공 등을 이용한 공격적인 마케팅전략을 구사하며 미원을 위협했으나, ‘조미료는 곧 미원’ 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바탕으로 철저히 품질로 승부하여 시장에서 80%의 점유율을 유지하였다. 1970년대 후반, 제일제당은 더 이상 ‘미풍’브랜드를 이용해서는 미원과의 조미료시장 전쟁에서 이길수 없음을 깨닫고 일본 아지노모토와의 기술제휴로 복합조미료 ‘아이미’를 시판하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광고와 강력한 유통망을 통해 이 경에서도 미원은 70%이상점유울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