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두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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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염상섭 『두 파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작가 소개
작품 소개 「두 파산」
작품 개관
줄거리
선행연구
텍스트 분석
구성
성격제시의 간접적 방법(보여주기)
시점
교육 방안
본문내용
작가 소개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음력 8월 3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야조현 고가 나무골에서 염규환과 경주 김씨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상섭(尙燮), 필명 상섭(想涉), 제월(霽月), 호는 횡보(橫步). 조부 염인식은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며, 부친 염규환은 가평ㆍ의성ㆍ예천 등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위로는 형 염창섭이 있었는데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에 복무하여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이후에 군대를 그만두고 오산학교에 교감이 된다. 오산학교 교감이 된 염창섭은 아우 염상섭을 학교로 불러들이게 된다. 염상섭은 이곳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1년 넘게 교원 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 교원생활의 경험이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들을 쓰게 하였다.
어려서 조부에게 한문을 수학했고, 열한 살에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관립사범에선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가 오는 날에 전체 학생을 참가시키고 황제의 거행시에는 반대표만 보낸 것에 항의하여 3학년 겨울에 자퇴한 뒤 이기붕, 최승만 등과 함께 보성소학교로 전학한다. 191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한다. 유학은 당시 일본군 육군 중위였던 형 염창섭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신 조선인으로서는 입학하기 어려운 명문중학에서 수학했었고 일본어에 매우 능했다고 한다.
염상섭이 문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1915년(19세) 경도 부립 제2중학교 시절 작문시간에 ‘우리 집의 정월’이라는 글이 교사에게 큰 칭찬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 가기 전까지 문학작품을 접해본 적이 없는 그는 일본에 가서야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읽게 되었다.
1918년 경도부립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에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곧 그만두게 된다. 1919년 『삼광(三光)』의 동인이 된다. 그해 오사카에서 3ㆍ1 운동 소식을 듣고 천왕사공원에서 거사하려다 피검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10월 26일 「암야」의 초고를 작성하고, 『삼광』에 작품을 기고하면서 습작 활동을 시작한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정경부 기자가 되는 한편, 남궁벽, 김억, 황석우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 22년 『묘지(만세전)』를 발표한다. 1926년 「신흥문학을 논하여 박영희군의 소론을 박함」으로 프로문학파에 도전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김경수, 『염상섭과 현대소설의 형성』, 일조각, 2008.
김윤식, 『염상섭 연구』, 서울大學校出版部, 1989.
문학과사상 연구회, 『염상섭 문학의 재인식』, 깊은샘, 1998.
염상섭, 『두 파산』, 문학과 지성사, 2006.
윤병노, 『廉想涉 硏究』, 새문사, 1982.
이병렬 엮음, 『현대소설 109선 1』, 문원각,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