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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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사 검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 부여·고구려 건국신화를 둘러싼 쟁점
2. 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사 검토
2.1. 고구려건국신화 원문자료 소개
2.2. 와 가 동일한 신화라는 견해
2.3. 와 가 별개의 신화라는 견해
3. 맺는 말 : 기존 연구의 한계와 남은 과제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 부여·고구려 건국신화를 둘러싼 쟁점
고구려 건국신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해석과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어 온 주제는 와 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조선 후기 때, 이미 정약용이나 신경준과 같은 실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논쟁이 집중적으로 제기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두 신화를 같은 신화로 보는지, 다른 신화로 보는지에 따라 부여의 건국신화인 가 부정되기도 하고, 와 가 합쳐지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두 신화를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본 발표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한국의 신화 연구는 서양의 연구보다 상대적으로 그 역사가 짧고 서양의 연구 방법과 그 학설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서양의 신화연구에 비해서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굵직한 학자가 많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본 발표에서는 어느 한 학자의 논지를 중심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논지와, 그것을 지지하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또한 같은 이유의 문제로 과거의 학자보다는 비교적 최근에 학계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연구들을 다루고자 하며, 이것은 오늘날 고구려 건국시조의 신화와 역사에 어떤 문제점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본지의 결론에서 다시 언급한다.


2. 본론 : 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사 검토
2.1. 고구려건국신화 원문자료 소개

한국
연대
중국

1세기 말
『논형』 「길험편」
광개토대왕 비문
414년

모두루묘지
5세기 중엽


554년
『위서』 「열전」 조
천남산묘지
702년

『구삼국사』 / 『동국이상국집』
고려 초 / 1193년

『삼국사기』
1145년

『삼국유사』
1281년



(1) 「광개토대왕 비문」
「광개토대왕 비문」은 414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에 있어서 가장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반도의 건국신화 중에서 자신들의 시조에 대해 직접 기술한 유일한 신화이므로 를 분석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기업을 창건하시었도다. 북부여에서 나오셨으니 천체의 아들이시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강생하셨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을 지니고 계시었다. 수레를 명하여 남쪽으로 순행하여 내려오셨으니, 도중에 부여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왕께서 나루에 임하여 말씀하였다. “저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입니다. 저를 위하여 갈대를 이어주시고 거북을 띄워 주소서.” 그 소리에 응하여 즉시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을 띄워 주었다. 그런 후에 건너갈 수가 있었다. 비류곡 홀본 서쪽 성 산 위에다 도읍을 세우셨다. 세상의 자리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자, (천제께서) 황룡을 보내어 내려가 왕을 맞이해 오게 하시었다. 왕이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머리를 밝고 승천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