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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일본근대사와 에도막부

Ⅲ. 일본근대사와 메이지유신
1. 구로후네(黑船)의 출현
2. 도쿠가와 막부의 멸망
3.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 폐번치현(廢藩置縣)
2) 사민평등(四民平等)
3) 징병령(徵兵令)
4) 지조개정(地租改正)
4. 문화 수용 -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파견
5. 산업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1) 1860~1885
2) 1885~
6. 군부의 관료지배
7. 일본의 식민지 정책 추진과 서구 열강과의 갈등

Ⅳ. 일본근대사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1. 청ㆍ일 전쟁
2. 러ㆍ일 전쟁

Ⅴ. 일본근대사와 태평양전쟁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만선사」라는 것은 동경제대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사의 독자성․자율성을 부정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인접한 「만주」와 연결하여 중국 주변 민족사의 일부로서 설정된 지역 .민족에 관한 역사이다. 실제로는 다른 민족인 「만주」인과 한국인을 합치려는 의도는 이 지역 및 민족이 근대 일본의 침략 대상으로서 명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1880년대에 형성된 일본의 근대 사학은 러일전쟁에서부터 한일합병의 시기에 걸쳐 동양사학을 생겨 낳지만, 그 제창자라고 할 수 있는 백조고길은 「만철」의 원조를 받아 「만선사」학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 상세 내용에 관해서는 제2장에서 논하겠으나, 동양사의 중핵을 없애는 중국사 연구에 앞서 우선 한국사 동시에 「만선사」로 연구가 진행되었고, 1910년대에 동양사학이 확립되었다라는 사실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만선사」학은 1930년대의 중일전쟁 중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연구수준으로서는 1910년 전후에 만철조사실에 집결했던 진전․지내를 초월할 수는 없었다. 단지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식민사학으로서의 조선사는 현지에서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동경제대를 중심으로 한 「만선사」학 이상으로 실증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 사관은 「만선사」학의 테두리 속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침략을 전략적 목표로 한 일본제국주의의 패전․붕괴와 함께 당연하게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패전 후 수년간, 역사학 특히 동양사학에서 한국사연국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은 역사연구자의 한국인식이 얼마나 빈약했던가를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대에 성립된 「조선사」학은 일제시대의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연배의 연구자와 동아시아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화를 반영한 「조선」에 호의를 가진 젊은 연구자의 두 가지 조류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두 가지 조류는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였지만 60년대에 있어서는 기전․미촌을 중심으로 한 후자 쪽이 연구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 김태준, 영일동맹 결성과 러일전쟁의 외교사적 분석, 국방대학교, 2010
- 김재윤, 에도막부(江戶幕府) 말기의 일불(日佛)관계, 한일군사문화학회, 2011
- 서정택, 메이지 유신(명치유신)의 성공원인과 의의, 고려대학교, 2001
- 장은상, 태평양 전쟁의 원인 :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국방대학교, 2007
- Mori Mayuko, 조선에서 바라본 청일전쟁 개전 과정과 종속문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