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통상론 대국굴기 일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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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북아 통상론 대국굴기 일본 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시아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나라가 바로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땅’ 일본이다. 일본은 여러 모로 영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동양에서 가장 빨리 공업화를 이룩한 국가는 바로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섬나라 일본이었다. 대륙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두 섬나라가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강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일본은 문명개화를 목표로 서양을 스승으로 삼아 사상, 제도, 생활 습관에 이르는 모든 방면에서 철저한 개혁을 단행했다. 일본 전체가 서양을 배우고자 했던 목적을 향해 달렸고,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문명 개화를 이루었다. 일본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진입한다’는 목표 아래 스스로를 철저히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이 급전직하의 상황을 맞이하며 패망하게 된 역사를 통해 우리 모두 진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1. 섬나라 일본의 건국
지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열도는 원래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시 인류와 동물이 자유롭게 오갔다고 한다. 기원전 1만 년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일본은 조몬 시대를 열었다. 이후에 일본은 야오이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논에 볍씨를 뿌리고 철제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 열도의 문명 형태가 근족적인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동시에 원시 촌락은 점차 원시 부락과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본 건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전설이 있는데, 일찍이 세상을 열었다.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통솔자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였다. 그녀의 후대가 일본의 통치자로 추대되어 개국의 왕이 되었으며 ‘진무 천왕’ 이라 일컬어졌다. 그는 기타큐슈에서 동정을 시작해 마침내 가시하라를 도읍으로 정하고 야마토국을 세웠다고 한다. 물론 이런 전설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야마토국이 정권을 통일한 당시 열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있다. 자신들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휘하 여러 신들의 후손이라고 여러 일본을 ‘신국’이라고 청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신사’ 또는 ‘신궁’ 이라 불렀다.
-대륙과 오랜 세월 단절되었던 탓에 문명의 개화시기는 늦은 편이었다.-
일본은 대륙과 단절되어 왕래하기 어려웠던 탓에 문명의 개화 시기도 인근의 대륙 민족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은 남의 것을 잘 배우고 모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민족들과 비교해보면 그래도 역시 자신들만의 특색 있는 문화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일본은 오랜 역사에 걸쳐 다방면으로 중국의 문명을 흡수했다. 한자와 한문, 유학, 불교, 율령제도, 생산 기술 등 중국의 것을 배우고 참고했다. 3세기 말경에 전해진 중국의 유학사상과 불교은 문화는 이후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4세기에 5세기로 넘어갈 무렵, 오진 천황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대륙문화를 더 배우고 물질문명의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문명의 거대한 영향 아래 일본은 4,5세기의 야만의 단계를 지나 문명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618년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로 넘어가면서 중국은 부흥기에 접어들었고 경제와 문화 면에서 전에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에 동아사아의 많은 국가들과 일본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는데, 일본에서는 조정과 일반 백성 모두 중국문명을 숭상했고 중국을 배우자는 붐이 일었다.
-중국 양명학의 실천 정신이 일본 혁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 송나라 때에 이르러 유학자 정이가 시작해 주희가 발전시킨 유학이 점차 송학으로 완성되었고 이것이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일본문화를 중국문화를 단순히 따라하던 ‘당풍문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특색을 지닌 ‘국풍문화’를 형성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 동철이 대량으로 유출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는 중국의 금속화폐가 폭넓게 유입되었다. 이는 바로 그 당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얼마나 활발하게 무역과 민간 교역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세기 반 동안 일본은 19차례에 걸쳐 견명사를 파견했다. 당시 견명사는 한학에 정통한 고승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에 대한 조공의 임무를 완수했을 뿐 아니라, 두 나라의 문화 교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일본의 봉건사회는 상품경제의 발전이 낳은 해결하는 데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실사를 중시하는 서양 학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유가사상의 영향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도쿠가와 막부 후기에는 정주학이 쇠퇴하면서 중국의 양명학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2. 봉건제 막부를 타파한 메이지 유신
일본에서는 9세기 중엽부터 200여 년에 걸쳐 귀족 세력인 후지와라 가문의 독재적인 섭정 정치가 펼쳐졌다. 이는 일본 역사상 조정의 투쟁이 가장 극력했고 변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미나모토노 요리모토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움으로써 일본 역사에 막부 시대가 정식으로 도래했음을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일본에는 이중적인 정권 체제가 탄생했다. 여전히 천황제라는 정치 체제를 유지한 채 현실적인 통치 권력을 가진 무사정권이 등장해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천하를 호령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일본 봉건제도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가마쿠라 막부의 경제적 기초는 전국에 널리 펴져 있는 귀족들의 장원이었는데, 여기에 새로 가담한 것이 군사귀족 계층인 ‘무사’였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인 12, 13세기는 내란이 끊이지 않고 분쟁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이후 16세기에 이르로 분열을 거듭하던 일본은 다시 한 번 통일을 맞게 된다.
-가마쿠라 막부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700년 동안 3대 막부가 일본을 통치-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다. 그는 황실의 신임을 얻어 여러 지역의 다미묘들을 제압하고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잇따른 조치를 내놓았는데, 이는 일본의 국내 사회를 안정시키는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정에는 성공했지만 외교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전략이나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을 점령해 아시아를 제패하겠다는 헛된 꿈을 꾸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국내의 위협 세력을 제거하고 에도를 일본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집권 초기에 막부 통치를 강화하고 중앙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국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를 막부가 직접 관리하도록 했다. 막부는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해 다이묘와 그 소속 무사의 권리와 의무를 규범하고 제한했다. 이렇게 쇼군은 영지를 나누어주고 봉록을 지급해 각지의 다미요 및 무사들과 군신의 굳건한 주종관계를 맺었으며, 다이묘 및 무사들과 군신의 굳건한 주종관계를 맺었으며, 다이묘들과 그 밑의 무사들 역시 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일정한 의무를 부담했다. 사회의 기타 계급은 ‘사농공상’ 으로 구분했고, 각 계급은 세습되었으며 서로 간의 통혼도 금지되었다. 16,17세기에는 강대국들의 해상 무역의 범위가 세계로 넓혀졌고, 이러한 흐름은 막부 통치 아래의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33년 2월부터 1639년 7월까지 도쿠가와 막부는 5차례에 걸쳐 ‘쇄국령’을 내렸다. 그 시작은 단순히 서양 종교를 금지하려는 것이었지만, 결국에는 전면적인 쇄국정책으로 나아가는 계가가 되었다. 이런방법은 얼마 동안 효과를 거두어 일본은 잠시 평화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너무 이른 식민통치의 악운을 피해갈 수 있었다. 봉건제를 고수하고 쇄국을 하는 소극적인 이념과 방법의 효과는 잠시뿐, 근본적인 역사의 흐름과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전 세계적인 진보와 개방의 흐름이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7세기 후반이 시작되자 일본의 국내 상풍경제가 걷잡을 수 없이 발전했고, 그로 인해 봉건경제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상인들이 부유해질수록 일본의 중하층 무사와 평민의 생활은 나날이 궁핍해졌다. 농민과 도시 빈민, 중하급 무사들의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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