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시련과 자주성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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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고려의 시련과 자주성 회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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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시련과 자주성 회복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원의 간섭과 사대부의 성장
- 원 간섭하의 개혁과 반발
- 공민왕의 개혁과 사대부의 성장

(2)신흥사대부의 문화
- 과학과 기술
- 성리학의 수용과 불교계의 변화
-역사와 문학·예술
본문내용
(1)원의 간섭과 사대부의 성장
원 간섭하의 개혁과 반발
1259년 몽고와의 전쟁을 끝내고 1270년 무신정권이 타도되고 왕정이 회복됨으로써 고려사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고려왕[원종]은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세자인 충렬왕의 비(妃)로 맞이하였는데, 그후에도 역대 국왕은 이러한 관례를 따랐다. 그리하여 두 나라 왕실은 혈연적으로 굳게 맺어지고, 고려세자는 북경에 머물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원제국의 부마[사위]가 된 고려왕은 원에 대해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반대로 원의 간섭을 받기도 쉬웠다. 원은 고려왕에 관련된 칭호를 격하시키고, 고려의 정치조직을 재편하였다. 왕의 묘호는 祖와 宗 대신에 ‘王’자를 쓰게하고, 묘호 위에는 반드시 ‘忠’자를 붙이게 하였다. 또한, 짐(朕)을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낮추었다. 이밖에 삼성(三省)을 통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중추원(中樞院)을 밀직사(密直司)로 바꾸었으며 6부중 공부(工部)를 폐지하고 리(吏) 예부(禮部)를 통합하여 전리사(典理司)로, 호부(戶部)를 판도사(版圖司), 병부(兵部)를 전법사(典法司)로 바꾸었다. 그리고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바꾼 것도 이때이며, 이는 고려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또 순마소(巡馬所)라는 기관을 두어 내정을 감시(관리들의 반원활동을 감시)하기도 하였고, 다루가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