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 명치- 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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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메이지 시대(1868 ~ 1912)◇
*1877(明治 10) 서남전쟁
-1877년 일본 서남부의 가고시마[鹿兒島]의 규슈[九州] 사족(士族)인 사이고 다카모리[西 鄕隆盛]를 앞세워 일으킨 반정부 내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는 1873년 조선사절단 파견을 둘러싼 집권부 분열(메이지 6년 정변)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에게 밀려 정계에서 물러난 뒤, 향리인 가고시마에서 사학교(私學校:일종의 군사학교)를 세우고 사족의 자제를 모아 교육에 힘썼다. 그러자 폐번치현(廢藩置縣) 후 영주제(領主制) 폐지 등 근대화의 정책 시행으로 봉건적 특권을 잃고 몰락일로에 있던 사족의 반정부 분위기가 사학교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1877년 이 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사이고를 앞세우고 거병, 1만 3000여 명이 구마모토진대[熊本鎭臺]를 포위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사이고 등 지도자는 대부분 자결하였다. 이 싸움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 사족의 최대·최후의 반란이었는데, 정부는 이 반란을 제압함으로써 권력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반정부운동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1889(明治 19) 대일본 대일본제국 헌법발포
메이지 정부는 자유민권운동의 압력에 억눌려 할 수 없이 의회(=국회)를 열 것을 백성들에게 약속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의회를 개최하기 전에 헌법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메이지 정부는 헌법과 의회를 만들 준비를 하며 더욱더 정치체제를 강화해 버렸던 것이다.
1889년 2월 11일 :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 공포
대일본제국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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