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성(知性) 최치원(崔致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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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라의 지성(知性) 최치원(崔致遠)
1. 中國을 압도한 大文章
고운(孤雲) 최치원은 신라 말엽에 육두품(六頭品) 출신으로서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黃巢)의 난을 격문으로 평정함으로써 문장은 능히 중국을 압도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유학의 시종(始宗)이 되었고 유불도(儒佛道) 3교에 효통(曉通)했을 뿐만 아니라 풍류도(風流道)라는 주체적인 사상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되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관련 기록에 의하면 고운의 시조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이고 아버지는 23세 산윤(山允, 一名 肩逸)으로 시랑(侍郞)을 지냈으며 고운은 24세로서 경주 최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최치원은 그의 능력이 탁월했던 만큼 그에 대한 설화도 수없이 많다. 특히 그의 말년이 그랬듯이 그의 출생 또한 매우 기이했다. 하루는 검은 구름이 사면에서 일어나고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어지러운 틈에 최치원의 어머니가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다.
집 뒤 일악령(日岳嶺)이라는 산에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밤에 최치원의 아버지가 달려가 그 바위를 살펴보니 바위가 저절로 열리며 그 속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들어가 보니 땅이 넓고 이상한 골짜기와 숲에 그윽하고 이제껏 보지도 못한 새가 꽃 사이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그곳은 신선의 세계였다. 동쪽으로 한참 들어가니 화려하기 그지없는 집이 한 채 덩그렇게 있는데 그 속에 황금빛 돼지가 여인의 무릎을 베고 용문석(龍紋席)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주위에는 수많은 선녀들이 그를 옹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바로 자기의 부인이었다. 그가 향을 바람에 날리니 부인은 그 남편이 구출하려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치원의 어머니는 황금빛 돼지가 따뜻한 물에 불려진 사슴의 가죽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 부인은 사슴 가죽으로 된 주머니 끈을 입 속에 넣어 불린 다음 돼지 목에 딱 붙여 버렸다. 그래서 돼지는 곧 죽게 되었다. 거기에서 구출된 부인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부인이 금 돼지에게 잡혀간 일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아들을 바닷가에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서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지 않는가? 이상하게 여긴 부모가 애를 데려 오려고 찾아 나갔으나 그 때는 이미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돌아오려던 그들은 어디선가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한 아이가 바다 가운데 높은 바위 위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아이는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이 때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그 아이는 본래 문창성(文昌星)인데 잠시 인간 세계에 내려와 최씨 집에 인연하게 되었노라. 아이의 어머니가 돼지의 변을 당하여 14삭만에 생산하였으니, 이는 자고로 이인(異人)은 열 달이 넘은 후에 태어나는 법이라, 이 아이는 최충(崔沖)의 아들이 분명할 뿐 아니라 그 돼지는 심상한 돼지가 아니로다". 그의 출생에 따르는 이러한 설화는 그의 삶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쉽게 짐작하게 해 준다. 그에 대한 비범한 설화는 실제 그의 생애 전체에서 확인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지혜가 절윤(絶倫)했던 최치원은 12살 때인 경문왕(景文王) 9년(A.D. 869)에 진봉사(進奉使) 김윤(金胤)을 따라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10년 동안에 급제를 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엄한 훈계를 뼈에 새겨 공부한 지 6년 만에 최치원은 외국인에게 보이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인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에 급제했다. 최치원은 성골(聖骨), 진골(眞骨)도 아닌 육두품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신분의 한계를 넘어 출세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자각하고 또한 개인의 영달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학문(學問)에만 전념하여 장원급제라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다. 급제한 뒤에 2년 동안을 시작(詩作) 활동에 전념했고 20살 약관(弱冠)의 나이에 율수( 栗水) 縣尉(현위)라는 벼슬에 나아가게 되었다. 벼슬을 하면서도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문집 5권을 만들어 복궤집(覆貴集)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최치원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시박능문(詩博能文)의 인재를 뽑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21세가 되던 겨울에 현위직(縣尉職)을 사임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다시 학문에 매진하였다. 현위직을 그만두자 녹봉이 없어져서 글 읽을 양식이 없을 정도로 구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동년우(同年友) 고운(顧雲)의 주선으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인 고변(高騈)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처음에는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가 1년 후에 고변의 서기직을 맡게 되었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종군하면서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짓게 되었다. 이 격문을 황소들이 읽다가 "오직 천하의 사람만이 너희를 죽이고자 할 뿐 아니라 땅 속의 귀신들도 너희를 죽이려고 의논했다(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之鬼 已議陰誅)"라는 대목에 이르러서 자신들도 모르게 상(床)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 명문을 씀으로써 최치원은 천하에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고변이 문장 보필의 공을 천자에게 알려 그는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시어사(承務郞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승직되고 천자가 내리는 하사품인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기까지 했다. 그 후 4년간 최치원은 고변을 대신하여 표(表), 장(狀), 계(啓), 서(書), 격문(檄文) 등 일만(一萬)여 편의 글을 지었다고 하니 그의 문장력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최치원은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 고변(高騈), 배찬(裵瓚), 장교(張喬) 등 당시 일급의 문인 호걸들과 교유를 하여 당시 국제 사회의 최고 지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오히려 이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최치원의 유학과 출세는 입신 출세라는 개인의 포부를 실천했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 우리 민족의 총체적인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쾌거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 천하를 놀라게 할 정도의 실력을 기른 최치원은 이제는 그 능력을 고국 신라를 위하여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나라 천자의 은근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28세 되던 해에 귀국 길에 올랐다. 고운이 신라로 돌아 올 때 동년우 고운(顧雲)이 증별시(贈別詩)인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中華에 떨친 최치원의 특출한 문재(文才)를 찬양하자 고운(孤雲)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답 시를 읊어 금의환향하는 기쁨을 노래하였다.
巫峽重峰之歲 나이 열두 살 되던 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