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십원가 연구 -보현행원품과의 관련양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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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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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보현십원가 연구
-보현행원품과의 관련양상을 중심으로-
목차:
일. 들어가며
이. 균여와 보현십원가
삼. 보현십원가의 내용분석
사. 나가며
一. 들어가며
『보현십원가』 『普賢十種願往歌』 혹은 『願往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以下 『普賢十願歌』로 부르기로 한다.
는 高麗大藏經 補遺版 冥函에 있는 釋華嚴敎分記圓通 권10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의 제7장 歌行化世分에 향찰로 표기되어 전한다. 작품은 모두 11수인데, 禮敬諸佛歌·稱讚如來歌·廣修供養歌·懺悔業障歌·隨喜功德歌·請轉法輪歌·請佛往世歌·常隨佛學歌·恒順衆生歌·普皆廻向歌·總結無盡歌 등이 그것이다. 이는 균여가 중생 교화를 위해 四十華嚴經에 있는 普賢行願品의 十鐘廣大行願을 작품화한 것이다. 김문기, 『韓國古典詩歌原典』 태학사, pp.470
여기서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은 『均如傳』의 원명으로 크게 序와 本傳 그리고 後序로 구성되어 있다. 本傳은 目次와 十門의 本文 그리고 後記로 나누어 진다. 이 가운데서 第七은 균여가 쓴 詞腦歌의 序와 그가 읊은 『원왕가』 11章을 싣고 있고, 第八은 균여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균여를 鑽仰하던 한림학사 崔行歸가 『원왕가』를 한시로 번역하고 쓴 譯詩의 序와 譯詩를 싣고 있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여 『普賢十願歌』의 창작동기를 살펴보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普賢行願品』과의 관계 속에서 『보현십원가』 각각의 작품의 내용을 검토 해보기로 한다.
二. 均如와 普賢十願歌
1. 균여의 생애
균여(923~973)의 속성은 邊이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 60에 임신하여 7개월만에 균여를 낳았다. 태어났을 때 균여의 몰골은 아주 추했으므로 내다버렸으나, 까마귀가 이를 보호함에 뉘우쳐 다시 거두어 길렀다. 그는 강보 안에 있을 때 이미 華嚴經의 偈를 잘 읽었고, 부친이 口授한 것을 강기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福興寺 識賢和尙 밑에서 배웠다. 저녁에 靈通寺 義順公에게 가서 배우고, 새벽에 돌아옴을 보고 識賢이 그의 뜻을 알아, 義順共에게 가서 배우게 하였다. 균여는 양식이 끊긴 처지에서도 싫증을 내지 않고 義順 밑에서 수학하고 나날이 정진하였다. 균여는 당시 남북 신라의 화엄은 말에 이르러서는 觀惠를 중심으로 한 남악(지리산)파와 希郞을 중심으로 한 북악(가야산)파로 나뉘어져 대립하게 되었다. 관혜는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 되고 희랑은 고려 왕건의 후원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갈등이 무척이나 심해서, 고려 통일 이후에도 그 풍조가 쉽게 수그러 들지 않았다.
으로 대립하고 다투던 海印寺 華嚴宗의 두 법문이 한 길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首座 仁裕와 함께 명산을 遊歷하고, 절을 왕래하며 불법을 크게 떨치니, 佛門의 젊은 승려들이 그를 따랐다. 또한 국가가 王輪寺에서 승시를 보일 때 균여의 설을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를 傍系로 삼으니, 才名이 있는 무리가 균여의 길을 따랐다. 분열하여 대립을 일삼던 화엄종의 두 갈래에서 小異를 자르고, 大同을 묶어 하나로 돌아오게 한 균여의 공은 참으로 컸다. 균여는 화엄학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신이한 자취를 남긴 고승이기도 했다. 그의 영이담 가운데 몇가지만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949년 光宗의 황후 大穆의 瘡疾을 고쳐주고, 대신 창질을 맡아 앓게 된 양순공이 죽게 되었을 때, 균여가 呪願하여 홰나무에 移瘡케 하여 양순공을 救病하였다.
(2) 953년 오랜 장마비로 광종을 책봉하는 禮命을 거행할 수 없자, 宋나라 使臣이 “나라의 聖人으로 하여금 날씨가 청명해지도록 빌게 하라”는 요청이 왕이 근심하더니, 國師 謙信의 추천으로 균여가 법석에 올라가 강연하니, 청명한 날씨가 돌아왔다. 이로써 광종은 冊禮를 무사히 마쳤고, 균여를 大德에 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