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통해 본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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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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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통해 본 문학사적 의의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김시습, 그는 누구인가
2. 금오신화(金鰲新話)
1) 금오신화 살펴보기
2) 작품 살펴보기
(1)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2)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3)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4)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5)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Ⅰ. 서론
김시습이 살았던 15세기는 정치, 사상, 문학 등이 변화하는 과도기였으며 사회적인 혼란이 심했던 시기이다. 그 시대 속에서 그는 평탄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방랑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에게 문학은 소통을 할 수 있는 매개체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담을 수 있는 도구 중 하나였다.
특히 그가 방랑을 하다가 금오산에서 지었다고 추정되는 금오신화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금오신화는 한국소설의 효시로 한문으로 작성된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져 있다. 금오신화는 총 다섯 작품으로 이루어져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이 그것이다.
이러한 다섯 작품은 사건을 전개하면서 기이한 일을 사건으로 삼았다. 이 사건들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준다. 작품들은 기이한 일을 사건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모두 학문을 하는 선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점, 결말이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성취의 모습을 보이는 점 등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대표적인 명혼소설 중 하나로 살아있는 사람과 귀신의 사랑이야기를 담아내어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그려내었고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꿈의 형식을 빌려 몽중소설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금오신화는 한국소설의 효시로 문학적인 의의가 큰 작품 중 하나이다. 따라서 먼저 금오신화를 지은 김시습에 대해서 살펴보고 금오신화의 다섯 작품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며 그 안에 있는 내용, 인물 등을 통해 금오신화 속에서 발견되는 문학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김시습, 그는 누구인가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조선 초기 문인이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17)년에 출생하였고 50세인(성종24년) 1493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세종부터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시대를 거친 인물로써 조선 초기인 15세기를 살았다. 그의 자(字)는 열경(悅卿)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스님처럼 법명을 가지기도 했는데 그의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에 성균관 북쪽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아 이를 보고 최치운이 보고 의 학이편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 불역역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따와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세살 때부터 시를 짓고 다섯 살에 중용, 대학들을 통달하여 보는 사람들마다 신동이라고 불렀다. 세종은 이를 영특히 여겨 자신 앞에 나아와 시를 짓게 하였는데 전혀 당황하지 않고 세종의 요구에 알맞은 시를 지어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리며 김시습은 영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신동이라고 불리었던 그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그가 15살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후 아버지의 병으로 형편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생활도 지속되지 못하였다. 김시습은 학업을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삼각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는 크게 한탄하며 읽던 책을 모두 불 지르고 중이 되었다.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키며 그는 삭발을 하고 방랑을 하게 된다. 단종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벼슬길에 다시 나가지 않고 자연에서 은거하였다. 김시습은 왕위 찬탈로 인해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중에 한명으로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