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연구] 김시습과 금오신화 연구 - 작품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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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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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시습과 『금오신화』 연구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매월당 김시습
1) 사회적 배경
2) 생애
2. 『금오신화』작품 설명
1) 만복사저포기
2) 이생규장전
3) 취유부벽정기
4) 남염부주지
5) 용궁부연록
3. 감상과 문학사적 의의
Ⅲ.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고전문학(古典文學)은 현대문학(現代文學)의 자양분이 된다는 중요한 의의(意義)를 지닌다. 본래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에는 이전 세대가 기반이 되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근대문학과 고전문학이 단절되었다. 고전문학을 바탕으로 근대문학을 설립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일본의 문화정책으로 그들이 유입해오는 서구 문화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현대에는 일제의 제약도 없고 고전을 연구할 충분한 여유가 된다. 때문에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현대문학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따라서 고전문학은 충분히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으며 현대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김시습(金時習)과 그가 쓴 최초의 한문(漢文)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연구하려 한다.
생육신(生六臣) 중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광기(狂氣)와 절의(節義)의 지식인이라고도 불리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최초의 한문 소설로 오늘날의 단편소설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위의 5편 외에도 더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있었다고 한다. 김시습의 작품들은 대부분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죽은 자와의 사랑이야기를,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용궁부연록』은 꿈과 죽음의 복합구조로 되어 있다.
본 논문은 김시습의 생애와 함께 그의 작품인 『금오신화』를 연구하고 그 의의를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금오신화』에 영향을 준 작품인 중국 명나라 구우(瞿佑, 1341~1427)가 지은 『전등신화(前燈新話)』와의 비교를 함께 보면서 작품을 분석할 것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등목취유취경원기(穆醉遊聚景園記)』와 비교하며,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은 『취취전(翠翠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감호야범기(鑒湖夜泛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 그리고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과 그 유사점이 보인다. 따라서 두 작품들 간의 비교를 통해 『금오신화』만의 특징과 의의를 찾아내며 연구를 마무리하겠다.
Ⅱ. 본론
1.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 사회적 배경
(1) 계유정난(癸酉靖難)
단종(端宗)은 1441년(세종 23)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7살의 나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2년 뒤 문종이 즉위하자 즉시 왕세자가 되었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39세로 승하하자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당시 단종의 나이는 12살이었고, 문종은 어린 아들을 걱정하여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원로대신에게 보필을 부탁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가장 위협적인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기 위해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손을 잡았고, 따라서 단종이 즉위하자 정국은 수양대군파와 안평대군·김종서파로 나뉘게 되었다.
단종을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국왕으로 만든 계유정난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 만인 1453년(단종 1) 10월 10일에 일어났다. 조정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손을 잡자 위기를 느낀 수양대군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을 수하 책사로 맞이하고, 홍달손, 양정 등의 유능한 무인 30여명과 양녕대군(讓寧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 등의 주요 종친도 그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의 경계심을 무마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후 한명회와 함께 쿠데타에 대비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다. 그리고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를 첫 목표로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수하는 철퇴로 김종서와 그의 아들들을 내리쳤고, 수양대군은 사대문과 주요 군 시설을 장악하였다. 단종에게는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역모를 책동했다고 보고한다. 사대문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당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한 후 살생부에 적힌 대신들을 모조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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