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문학 연구] 가면극(탈놀이)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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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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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가면극(탈놀이)의 이해

1. 들어가며
2. 가면극의 기원
3. 가면극의 분포
4. 가면극에 나타난 민중의식
5. 나가며
1. 들어가며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탈놀이를 즐겨왔다. 특히 조선 시대의 서민들은 탈놀이를 통해 양반 계층의 부조리한 면들을 신랄하게 풍자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가면극은 구비문학의 특성상 조선 후기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후대에 전해져 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탈춤의 역사에 관한 논의는 자료의 결핍 때문에 처음부터 곤란을 겪게 된다. 모든 사적 연구에서 사용되는 기본 자료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탈춤의 경우에는 역사의 연구를 가능하게 할만한 문헌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신라의 처용가무나 오기(五技)에 관한 기록이 있어도, 이런 것들을 후대의 탈춤가 바로 연결시키기 어렵다. 그 후의 기록에서도 탈춤에 관한 언급이 단편적으로 발견되기는 해도, 단편적인 언급을 모아서 연극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조동일, 『탈춤의 역사와 원리』, 기린원, 1988, p.45.
이에 본고에서는 가면극의 기원, 현재 전승되고 있거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재연되고 있는 가면극의 분포 및 그 속에 나타난 민중의식, 현대적 의의 등을 중심으로 논의해 나가겠다.
2. 가면극의 기원
1) 산대희기원설
산대희기원설에 의하면, 산대희에서 산대극(산대도감극)이 생겨났고, 산대극의 지방 분산으로 각 지방의 탈놀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산대희는 신라시대 이래 조선 중기까지 지속되었는데, 놀이의 시기나 목적, 놀이판의 분위기에 따라 변화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산대는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고 하는 가설무대로서, 산과 같이 높은 무대, 비단으로 장식한 다락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인 명칭이다.
산대희기원설에 의하면, 산대희는 신라, 고려, 조선을 경과하는 동안에 복잡 화려해졌고, 공연도 빈번하였으나, 인조 때 일단 중단되고 다시 영조 이후 국가적인 행사로는 폐지되자, 그 연희자인 반인(伴人:편놈)들이 민간에서 산대놀이 즉 탈놀음을 시작했는데, 탈놀음의 연기는 규식지희 규식지희는 주질(注叱:줄타기), 농령(弄鈴:방울받기), 근두(斤頭:곤두박질), 토화(吐火), 만연어룡지희(曼衍魚龍之戱 : 가면춤의 일종), 무동춤, 곰놀이, 섭독교(獨), 꼭두놀음, 장간희(長竿戱 : 솟대놀이), 사자춤, 호랑이춤, 만석중춤 등의곡예와 각종 무용이 중심을 이룸.
의 계승이고 대사는 소학지희 소학지희는 즉흥적인 재담이나 화술(話術)로써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연출해 보이는 일종의 소극(笑劇)이었다.
에서 비롯되엇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연희자들의 지방 분산으로 각 지방의 탈놀음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