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합 서씨 영수합 서씨 생애 영수합 서씨 문학적 배경 영수합 서씨 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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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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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서 론
조선시대는 사대부(士大夫)문학의 시대라 할 수 있을 만큼 사대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당시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에서 여성이 한문으로 문학을 하는 행위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금기시 되다시피 하였다. 때문에 조선조의 문학과 학술은 남성위주로 그것도 한문학이 거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문학 활동은 표면화되지 못하고 개별적 활동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한글이 창제되면서 여성전용의 글자로서 문학 활동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를 거쳐 후기로 갈수록 문예를 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가정의 학구적 분위기는 여성들을 자극하여 문예창작에 참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 (1753-1823)는 경화사족의 후예로 문한가의 학자적 가풍에서 글을 익혀 유수한 문학작품을 남겼던 인물이다. 그는 결혼한 이후에도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여 자녀간에 혹은 부부간에 문학 활동을 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이렇듯 집안에서 전폭적인 지지로 문학적 훈련을 받은 사대부가 여성 중 영수합 서씨가 주목받는 이유는 사대부가 여성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한시의 경우, 신분적으로 불우했던 기녀나 소실이 창작한 경우는 흔희 있으나, 사대부가의 여성으로 그것도 만년에 이르도록 자신의 창작활동을 한 경우는 흔치 않으며, 그 뒤 후손들이 문집으로 간행한 것은 더욱 드문 사례에 속한다.
먼저 영수합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생애와 시 상대였던 남편, 당대의 정치가, 문학가였던 자녀들과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시작분석을 통하여 그녀의 시에 대한 인식과 그 특징들을 알아볼 것이다.
2. 생애와 문학적 배경
영수합 서씨(영조18.1753-순조23.1823)는 본관(本貫)은 달성(達城), 순조조(純祖朝)에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던 공인모의 부인이다. 이름은 여성에겐 이름 밝히기를 꺼려한 까닭에 남편이 붙여 준 그녀의 거실명(居室名)만 전해올 뿐이다.
영수합은 14세 되던 해에 홍인모(洪仁謨)와 혼인을 한다. 시조 洪지경은 고려 때 국학직학을 지냈고, 그의 7대조이자 선조의 사위였던 공주원은 송시열과 교류하였고, 증조부 공상한은 사대부 출신이였다.
남편 홍인모는 홍락성의 둘째 아들로 홍락최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홍인모(영조 21, 1755- 순조 12, 1812)는 초명(初名)이 대영, 자(字)는 이수, 호(號)는 족수거사(足睡居士), 본관(本貫)은 충산이다. 1783년(정조 7)에 사마시에 합격,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랐다. 성품이 소박하고 강직하여 권세 있는 사람과 사귀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고 경사(經史), 음양(陰陽), 의약(醫藥), 손오(孫吳)의 병서(兵書) 및 도교와 경전(經典)에 통달하였다.
영수합 서씨의 아들딸 역시 당대의 문장가가 되었다. 장자(長子) 석주(奭周)(1774-1842)는 1795년(정조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까지 오르고 현종이 즉위하자 실록(實錄) 총재관으로 두 번 임명되기도 하였다. 천성이 침착하고 근면하여 항상 검소하였고, 현직에 있으면서도 포의(布衣)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는 전통적 주자학에 시종(始終)하였으며 한학과문장면에서 유명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과학사상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차자(次子) 길주(吉周)는 20세 미만에 문장에 통하여 경전에 정통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평생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고, 만년에 군(郡), 음(邑)을 다스려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세사(世事)에 뜻이 없어 이어 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