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열풍 속에서 그녀의 시조를 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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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황진이 열풍 속에서 그녀의 시조를 읊다
Ⅰ. 서론
작년 가을, 조선시대 시인 겸 명기인 황진이의 삶을 그린 드라마 가 큰 인기몰이를 하다가 종영하였다.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던 황진이는 현대에 와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한 관심이 이어지던 소재였으나 특히 요즘 그 관심도가 뜨겁도록 높다. 드라마 가 인기몰이를 하고 종영한 데 이어 바로 며칠 전에는 영화 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 뿐 아니라 김탁환의 (2002년), 전경린의 (2004년), 북한 홍석중의 (2002년)가 소설로 선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이 방영, 혹은 제작되고 있다. 내년에는 라는 드라마가 조선시대 기녀학교를 통해 기녀의 인간적인 다양한 측면을 보여줄 예정이라 한다. 이렇듯, 말 그대로 ‘황진이 열풍’이 요즘 들어 거세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작품론은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문화 콘텐츠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황진이를 그녀의 화려하고도 파란만장한 삶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시조 몇 수를 통해 문학적으로도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황진이’ 그녀는 누구?
황진이는 생몰년 미상의 조선 중종 때 명기(名妓)이다. 개성 출신으로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이며 기명은 명월(明月)이다. 그에 대한 직접 사료는 없고 다만 간접 사료인 야사에 각양각색으로 전해지며 지나치게 신비화시킨 흔적이 보여 허실을 가리기 어렵다. 황진사의 서녀라는 설과 맹인의 딸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기생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 딸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기생이 된 동기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황진이를 혼자 연모하다 죽자 서둘러 기계에 투신했다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노인숙, 황진이 한시 연구, 『청람어문교육』23집, 청람어문교육학회, 2001. p. 225.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월시(初月詩)》 등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100.nhn?docid=173946)
2. 기존 연구
시조는 조선 전기에 성리학적 사상으로 무장된 사대부 계층에 의해 향유, 발전된 것으로써 남성 주도의 장르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고전 시가 장르에서 본격적인 여성의 참여가 이루어진 것 또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고전시가 장르에서 여성의 참여는 향가에서부터 있어왔으나 작자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시조에 이르러서 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에겐 폐쇄적인 장르였던 시조로부터 여성 작가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이 사실은 사대부 남성들과의 교유(交遊)를 위하여 시조 제작에 나섰던 기녀들의 참여로 가능할 수 있었다. 기녀는 신분으로는 비록 천민에 해당하지만 사대부와 교유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상과 취향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므로 사대부들이 향유했던 시조 장르에 기녀들 또한 익숙해야만 했다. 김상진, ‘기녀시조의 맥락과 황진이 시조의 팜므파탈’, 박노준,『고전시가 엮어읽기』, 태학사, 2003. p. 86.
기녀의 본질은 사치노예로, 신분적으로는 가장 천민에 해당하면서도 귀족층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존재였다. 김동욱, 이조기녀사서설-사대부와 기녀, 『아세아여성연구』5집, 아세아여성연구소, 1966, pp. 75-77.(김상진, 「청산리 벽계수」와 「텐미니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한국언어문화』제 27집. p.190. 재인용)
그들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대부와의 교유가 잦아짐에 따라 그들은 귀족과 천민의 만남이 아닌 남녀의 만남으로 그 성격이 변모되고 둘 사이에는 종종 연정이 싹트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대부와 기녀는 본질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사이였다. 기녀는 원칙적으로 관기이기 때문에 관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을 나누었던 사대부가 임지를 옮겨 떠나면 그녀들은 홀로 남겨지게 되고, 그러면 정절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기다림 속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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