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파 김상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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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월파(月坡) 김상용론
1. 작가의 생애와 활동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은 1902년 경기도 연천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누이동생 김오남은 시조 시인이다. 부친 김기환은 한의사로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한편, 1만여 평의 농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그는 피신 차 일시 낙향하게 되었다. 그 동안 결혼을 하고, 다시 서울에 올라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했다. 그 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1927)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이화여전에서 영문학 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김상용은 1926년 『동아일보』에 시 「일어나거라」를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출발하였고, 그 뒤 1930년 3월호 『조선지광』지의「이날도 안저서 기다려볼ㅅ가」,「무상(無常)」,「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등 을 발표였다. 또한, 『동아일보』와 잡지『신생』에 투르게네프, E.A.포, 바이런, 테니슨 등의 번역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주로 번역한 시들은 바이런, 테니슨과 같은 영국 낭만파 시인들의 시였기 때문에 그가 창작한 시들도 이러한 특색을 보이는 것이 많다.
그의 시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34년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비롯한 전원시풍의 시를 쓰면서부터였다. 그는 전원시풍의 시를 통해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 전원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을, 낙관적인 방식으로 어둡지 않게 표현 하였다. 권형민(2004), 『한국 현대문학 대사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39년 『문장사』에서 시집『망향(望鄕)』을 출간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영문학 강의가 폐강되어 이화여전을 사직하고 종로에서 장안화원(꽃집)을 2,3년간 경영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강원도 도지사로 임명되었으나 며칠 만에 사임하고 이화여대로 복직하여 교수, 학무처장이 되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고 1949년에 돌아왔다.
1950년, 사회와 현실에 대한 풍자적 시각을 담은 수필집 「무하선생방랑기」를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했으며 이외에도 20여 편의 산문집도 간행되었고 평론활동도 하였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자 그는 숨어 지내다, 928 수복 이후 공보처 고문을 역임하고 『코리아 타임즈』의 사장을 지내다가 1951년 6월 20일 부산에서 게를 먹고 식중독에 걸렸는데, 의사의 잘못된 투약으로 인해 49세의 나이에 식중독으로 사망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있다. 김재용(2002년 8월),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67호): P.123~148
2. 작가의 시 세계
김상용의 시작 활동은 크게 시조 및 민요 형과 자유시로 구분되는 데, 초기에는 시조 및 민요로 출발하여 후에 자유시로 전환한 것이다. 김상용 시에 대한 연구 중 가장 깊이 있는 연구는 김학동을 들 수 있다. 김학동은 월파의 시 세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