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素月) 김정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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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소월(素月) 김정식론
1. 생애와 문학 활동
1)생애
소월(素月) 김정식은 1902년 9월 7일 평북 구성군 왕인동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남으로 공주 김씨의 문중의 장손으로 태어난다. 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인데 정주에 있다는 소산에 뜬 흰 달을 비유하여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을 지었다.
소월이 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한 뒤 정신 이상을 일으켜 일생동안 폐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조부의 보살핌을 받고 성장하였다. 소월이 네 살 되던 해, 계희영이 첫째 숙모로 시집온다. 신학문에 깨인 아버지덕택에 언문을 깨우쳐 많은 고대 소설과 설화를 탐독했던 계희영은, 소월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 등은 숙모에게 들은 옛날이야기, 민요의 설화적 소재를 통해 씌어 진 시라고 본다.
소월은 13세(1915) 때 고향의 남산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4세 때 홍단실과 혼인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닫혀있던 향토 생활을 떠나 시야를 민족이나 국가차원으로 넓히게 되고, 일생 동안 스승으로 모시게 된 안서 김억을 만나 문학에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서와의 만남으로 소월은 인간적 민족적인 한을 문학으로 승화시키고 그의 소개에 의해 문단에 진출하게 된다. 1920년 3월 《창조》통권 5호에 ,,,,을 발표하게 되고 같은 해 7월《학생계》에 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배재고교로 편입 하고 그해《개벽》19~29호에 ,, , 등 발표한다.
배재고교 졸업 후 1923년 일본유학을 떠나지만 가산이 기울고 관동 대지진으로 그 해 10월경 귀국한다. 귀국 뒤 안서의 추천으로 주요한, 김동인 등이 참여하고 있던 《영대》동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때(1923~25년까지)가 그의 작품 활동의 황금기였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던 1925년, 불후의 명작인 시집《진달래 꽃》이 발간되었다. 소월의 시편들에 나타난 민요적 서정성, 한과 슬픔의 정조, 설화성 등은 이내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24년 그는 상속받은 전답을 팔아 처가가 있는 구성군 평지동으로 이사한 뒤,《동아일보》지국을 인계받아 혼자 경영을 도맡지만 사업수완이 없고 처세에 서툴러 곧 파산 지경에 이르고 고리대금까지 손을 대나 실패하고 만다. 이란 시를 보면 그 당시 궁핍한 삶이 드러난다. 이때부터 문학, 생활,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을 놓아버린 소월은 술에 기대에 세월을 보낸다. 1934년 음력 8월 스승 김억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이라는 시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마지막 글이었다. 결국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김소월은 1934년 12월 23일 33세 나이에 음독 자결로 사망한다.
2. 작품 경향
1)초기시(《창조》에 처음 시를 발표한 1920년부터 1922년 까지 쓴 시 61편)-슬픔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스승 김억과의 만남으로 그의 시작(詩作)생활이 움트는 계기가 되었고, 이 둘의 교류는 서구화되어 가는 한국 근대시를 전통적인 기반 위에 자리잡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가정의 불행,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주위 사람들의 불행한 삶 등으로 인해, 이 시기의 시는 주로 슬픔이 나타나 있다. 시대와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 개인적 아픔을 드러낸 서정시 위주의 창작을 주로 하였는데 대표적인 시로 , , , , , 등을 들 수 있다.
2)중기시(1923년부터《진달내 》이 발간된 1925년까지 쓴 시 112편)-식민지 현실 인식,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애착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