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白石) 백기행론 - 생애와 문학 활동 & 문학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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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석(白石) 백기행론 - 생애와 문학 활동 & 문학적 특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백석(白石) 백기행론
1. 생애와 문학 활동
백석 백석(白石)이라는 필명은 백석이 좋아하던 일본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이름에서 따온 것.
(1912~1996)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으로,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의 오산마을에서 부친 백용삼과 모친 이봉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백 용삼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쳐서 생계를 유지했다.
백석은 1918년 오산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924년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 선배 시인 김소월을 선망 김소월과 백석은 공통적으로 ‘고향’, ‘인정’ 등에 관련된 시를 많이 남긴다. 둘 다 고향을 떠나 낯선 타향살이 속에서 방황하며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김소월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인정, 사랑에 토대를 둔 유대관계의 동경 등은 백석의 문학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하며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1929년 에 오산고보(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30년 19세의 나이에 조선일보의 신년현상 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의 아들」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동향 출신인 방응모가 경영하는 조선일보사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의 청산(靑山,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이 때 본격적인 서구 사조를 접했다고 생각되어진다.
1934년, 23세의 나이에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출판부에 소속되어 『여성』의 편집을 맡게 된다. 1935년 6월, 백석의 평생에 있어 구원의 여인으로 남은 ‘란(蘭, 박경련)’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8월 30일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본격화 백석의 시작활동에서 특이점은 어느 유파나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혼자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는 점이다.
하게 된다. 또한 조선일보에서 창간한 종합지 『조광(朝光)』의 편집을 맡아서 작품을 본격적으로 발표하였다.
1936년 1월 20일, 시집 『사슴』 시인 윤동주가 백석의 시집 을 구하지 못해 빌려 전체를 필사해 보관하였다고 한다. 백석과 윤동주 둘 다 ‘프랜시스 잠’을 좋아했었고,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대조해 보면 윤동주가 백석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을 2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하였고, 이윽고 4월,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그의 인생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여인인 ‘자야(子夜)’를 만나게 된다.
1939년, 영생고보를 그만 둔 후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였다가 그만두고 연말에 만주의 신경(新京, 현재 지명 장춘長春)으로 떠난다. 그리고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의 황씨방에 거처하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 근무한다. 1941년에는 생계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등의 일을 하며 번역에 몰두한다.
1945년에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고, 신의주에 잠시 거주하다가 평북 정주로 귀향한다. 이 때 세 번째 아내 이윤희와 결혼하여 삼남 이녀를 둔다. 이후 1956년까지 여러 책을 번역하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등 아동문학에 관련된 글을 발표한다. 1957년 4월에는 동화시집을 발간하고, 『아동문학』 4월호에 「멧돼지」외 3편의 동시를 발표하여 아동문학 논쟁을 촉발시킨다. 이 일로 인해 1959년 1월에 평양에서 추방되어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에서 양치기 일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