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고려 사회의 사회 성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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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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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려 사회의 사회 성격론
고려는 귀족제 사회인가? 관료제 사회인가?
먼저 고려사회가 성립되기전의 시대 상황부터 관료제 체제가 정비될 때까지 상황을 보겠다.
통일 신라 말기이기도 한 후 삼국시대에는 어느 세력도 중앙 집권적인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8세기 중엽 이래 신라의 정치 상황은 진골 귀족들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끊이지 않으면서 매우 어지러웠다.수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지배 계급 내부의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면서 자연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다.9세기 말에 이르면 신라사회를 이끌어왔던 골품제는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전제 왕권은 그 권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으며,중앙 귀족들은 부패하여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 세력인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앙정부에 항거하였다.새로이 등장한 호족에는 토착적인 지방 세력이 성장하여 호족이 된경우와, 지방에 내려간 중앙 귀족이 호족화한 경우가 있었다. 호족은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뛰어난 친족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호족들은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칭하며 사병을 보유하여,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경제적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골품제 사회는 해체되어 갔고, 호족 세력들에 의해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게 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 역시 송악 지역을 중심으로 기반을 다진 호족세력이었다.
호족 세력의 일원이었던 왕건은 마침내 세력을 키워 다른 호족들의 후원속에 고려라는 신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남쪽에는 견훤이 이끄는 강건한 후백제 세력이 건재하고 있었다.또 지방 곳곳에는 신왕조를 위협하는 호족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다.고려 왕권에 대항하는 호족 세력의 위협은 즉각 드러났다. 왕건이 왕이 된지 불과 5일 째 되던날,환선길이 반역을 도모했다. 왕건이 왕이 되는 데 공헌했던 환선길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졌던 것이다. 또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 째 되던 날에는 웅주(지금의 공주)를 장악하고 있던 이흔암이란 자가 반역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단되기도 했다.왕건이 즉위한지 채 보름도 되기전에 반역사건이 두 번이나 발생한 것이다.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후백제와 가까운 지역에 있는 호족들 사이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곧 임춘길,진선과 같은 청주지역 호족 세력들이 모반을 꾀하여 왕건에 저항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건국되면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호족의 통제와 왕권의 강화였다. 태조 이후 제 5대 경종대까지의 시기에는 호족들이 왕족 못지 않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 형태를 호족 연합 정권이라고 부르곤 한다.당시 호족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막강한 부와 권력을 세습하면서 고려 왕조가 출발한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이 때 고려의 왕은 막강한 호족들을 상대로 타협을 하며 국정을 이끌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고려 왕조와 지방 호족은 서로 대등한 관계 속에 연합정권이란 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고려 전기는 귀족들이 중심을 이룬 귀족 정치 시대로서,이를 기반으로 귀족 사회가 발달하게 된다. 태조이래 여러 왕들은 호족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면서도, 호족의 통제와 왕권 강화를 위해 늘 고심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은 제 4대 광종대에 이르러 진척을 보이고,제 6대 성종대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맺게 된다.
광종은 즉위 후 7년이 될 때까지 조용히 정국을 관망하며 힘을 기르다가 7년 째 되던 해부터 호족들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는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956년 노비 안검법을 단행한 것이다. 원래 양민이었던 노비를 해방시켜주는 이 법은 호족의 경제적,무력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조치였다.당시 지방 호족들이 거느렸던 노비들 중 많은 수는 애초부터 노비가 아니었다. 대부분 후삼국 전쟁의 와중에 포로로 잡혔거나,채무자,극빈자였던 양민들이다. 이들 노비들은 호족들의 농사일에 종사하거나 유사시 사병으로 동원되는, 호족들의 경제적,무력적 기반이었다.호족의 자체 무장력은 왕권에 위협적이었다. 호족들은 노비의 수를 늘리기 위해 노비 남자와 양인 여자의 결혼을 강요해 양쪽 다 노비로 삼고, 이들 사이의 자식들 역시 노비로 전락시켰다. 때문에 노비가 급증함으로써 국가의 조세수입이 줄고 국방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노비를 하루 아침에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조치는 호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으나, 광종은 이런 반발을 무시하고 강력히 시행해나갔다.
노비 안검법이 시행되고 2년 뒤인 958년에는 과거제가 실시되었다. 과거제는 호족 자제들을 관직에 등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시험에 합격한 인재를 기용함으로써,호족의 정치적 기반을 축소시키는 반면 왕권을 강화시키는 방안이었다. 광종의 입장에서 보면 호족세력들에 대항할 새로운 세력기반이 절실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왕권을 중심으로 국정을 이끌 새로운 인재층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거제는 바로 이들 인재를 충원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과거 시험의 종류는 문장을 짓는 능력과 정책에 관한 의견을 묻는 제술과,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명경과,천문 지리 번역 의학 등의 일에 종사할 인재를 뽑는 잡과등 3개 과였다. 과거제가 시행되자 이를 준비하기 위한 학교가 전국적으로 세워지고 유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렇게 과거를 통해 선발된 신진 관료들이 왕권의 강력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과거제 시행 2년 뒤에는 공복제를 실시했다.관료의 등급에 따라 네가지 색의 관복을 입게 한 제도이다. 이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체제가 정비된 셈이다.
과거제의 시행으로 호족 중심의 공신 주도 정치에서 신진 관료정치로 변화를 꾀하게 된다.
중앙 집권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지방의 호족들이 중앙 집권 체제속의 관리가 되면서 중앙 귀족으로 전환되어 갔다.주로 신라 신라 6두품 계통과 근기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다.
이들은 가문과 문벌을 중시하고 왕실과 혼인 관계를 통해 특권을 누렸다.고려 왕실은 오랜 동안 호족 세력 때문에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무력을 가진자를 견제하였으므로,과거를 통해 진출한 문신 관료를 중심으로 정치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고려 시대의 관료제(官僚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