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고려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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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고려의 교육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교육철학 및 교육사
고려의 교육
고려의 교육
신라 말의 혼란기에 개성의 호족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그는 수도를 개경으로 정한 다음 935년(태조18년)에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고 다음해에 후백제를 멸하여 전국을 통일하였다.
통일신라의 씩씩한 기상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시대에 와서도 그 전통의 흐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우선 우리 민족의 영역이던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만주대륙의 진출을 위해 북진정책을 추진했던 태조 왕건의 기본 정책에서 드러난다.
이처럼 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주체성이 강한 민족의식을 가진 국가로서 신라의 문화는 물론 사상까지도 계승하여 유교와 불교 및 화랑도 사상을 문화적, 정신적 기반으로 하였다. 특히 불교는 수신의 도로서 국가의 국운을 번영하게 하여 나라를 수호한다는 생각에서 민간신앙으로 숭신되었고, 유교는 유교적인 통치기구가 짜여지면서 치국의 도로서 장려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화랑도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민족의 주체성과 진취성을 진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의 교육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사상의 기반이 되는 화랑도 사상과 불교 및 유교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려 태조는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화랑도와 그 정신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고사라는 국호에 담긴 의지를 펴기 위해 자주정신의 지주로서 수용하였다. 이는 화랑도 정신이 우리의 고유사상으로 민족의 주체의식과 용맹성뿐만 아니라 자주정신의 높은 이념과 기백을 내포하고 있어 국시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랑도 정신은 불교와 타협하고 은연중에 낭불과 유교는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결국 유교사상을 대표한 김부식과 낭불사상을 대표한 묘청 간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 묘청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묘청파의 패배로 인해 유교사상은 당당한 세력을 얻게 되었으며, 보다 적극적인 유교사상의 구축을 위해 유학중심의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다. 그러나 화랑도사상은 고려 중엽까지 민간사상으로 전승되어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큰 공헌을 하였으며 후에 고려시대의 문헌공 최충헌이 세운 십이도를 비롯한 교육기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화랑도 정신은 고려왕조 500년을 통하여,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이 어떠한 외세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주성과 주체성을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화랑도 정신과 함께 호국의 차원에서 불교를 장려하였다. 신라시대에 번창했던 불교는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교육적 의의도 지대하였다. 고려의 불교는 호국적 성격 때문에 신라시대 때 보다 오히려 더 장려되고 보호되었다. 그리하여 흥왕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고, 면세, 면역, 전지와 노비 등 각종 특혜가 주어져 사찰들은 부를 축적하게 됨으로써 승려는 귀족신분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고려불교는 귀족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 광종 때부터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어 불문에 들어간 사람은 이를 통해 회관에 등용되고 법호와 승직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음악과 가무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제전으로 거행함으로써 불교가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처럼 불교가 외형상으로는 융성했으나 교리의 발전은 별로 없었으며, 종파간의 대립으로 오히려 교리의 침체를 가져왔다. 결국 고려시대의 불교는 대중생활 속에 침투하여 민간신앙을 지배하고 호국에 기여하였으나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동경하여 개인의 수도에만 급급한 나머지 고려시대의 교육사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태조 왕건은 불교를 종교로 숭상하는 동시에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유교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제4대 광종 때에는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과거제도가 시작되어 모든 학자들이 유학경전과 문예에 열중하게 되었고, 제 6대 성종은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대폭개혁하고 학문 산업을 중요시하여 국가의 기반을 굳게 하였으며, 특히 유학대학교인 국자감을 설치하여 유학을 장려하였다. 이로부터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제 11대 문종 때에는 해동공자라고 칭송받은 최충과 같은 인물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초기의 유학은 경학중심이나 이론 중심이 아니라 대개 사장 중심이나 문예중심이었다. 이는 과거에서 명경과보다 제술과가 더 중시되었고, 또 경학이 어렵고 이론적임에 반해 사장은 화려하고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종은 국자감에 양현고를 두고 명유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는 등 장려책을 씀으로써 유학사상은 부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초.중엽까지는 불교는 수신의 도인 민간신앙으로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치국의 도로써 상호 대립과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화랑도 정신과 함께 고려정신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고려 시대의 교육의 특징
① 국공립 교육기관이 발달하였으나, 대학 수준의 학교는 11대 문종 이후부터는 사 립대학이 더 발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