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계몽 으로 표상 된 농촌 1930년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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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계몽 으로 표상 된 농촌 1930년대 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계몽’으로 표상 된 ‘농촌’
-1930년대 초중반에 나타난 ‘농촌극’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고향(故鄕)’이라는 용어에 혼재되어 있는 ‘농촌’, ‘시골’, ‘고원’, ‘고산’, ‘향촌’ 등과 같은 다양한 공간적 이미지 중에서 본고가 주목하는 것은 ‘농촌’이다. 전광식, 『고향』, 문학과 지성사, 1999, p25 참조.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농촌극’에 대한 논의가 1930년대 초중반에 전개된 ‘브나로드운동’과 연관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농촌(농민)’을 함께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작품 속에서 발견한 인물이 갖는 전형적인 성격이나 모습들이 작가나 시대에 의해 선택되고 제도화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역사 내적이든 역사 외적이든 근대적 개념에 묻혀 있는 연속성이 무엇이든 간에 바로 이 개념들 자체가 구성되거나 ‘발명된’ 요소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근대 ‘민족’을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것 대부분이 그런 구성물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적합한 상징이나 혹은 알맞게 재단된 담론” 에릭 홉스봄 외, 박지향장문석 역,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2004, p41.
과의 연관성도 충분히 재고해야 한다는 에릭 홉스봄의 지적처럼, 작가에 의해서 상상되고 창조되는 과정 속에 작용했을 법한 역사성이나 담론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견해에서 볼 때 1930년대에 희곡 작품에서 재현되고 있는 ‘농촌(농민)’ 역시 작가에 의해 재편될 수 있으며, 그 재편되는 방식에 있어 ‘브나로드운동’과 같은 ‘계몽담론’이 미칠 영향력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의는 나아가서는 ‘고향’의 표상 공간인 ‘농촌’에 투영된 계몽담론이 곧 ‘고향’을 인식하는 담론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930년대 초중반에 해당하는 희곡 작품을 통해 작가에 의해서 계몽의식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으며, 또 이러한 담론을 어떠한 양상으로 ‘농촌’과 관련짓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농촌이라는 공간에 투사된 ‘고향’에 대한 인식도 아울러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2. 무대 공간의 확장-‘경성’에서 ‘농촌’으로
19세기 후반에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 자본주의는 조선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발생시켰다. 산업화로 인해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시각적인 것’에 중점을 두게 되고, 전차와 같은 근대 교통의 발달은 문명의 번화가인 ‘경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형성시킨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문예 부흥과 함께 문화 보급의 장(場) 마련을 촉진케 했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탄생시킨 것이 바로 문화와 예술을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공간인 ‘극장’이다. 이렇게 극장이 근대 문화의 형성소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황실극장이었던 ‘협률사(協律社)’가 상업극장으로의 변모됨과 아울러 민간인이 운영하는 사설극장의 확산에서 비롯된다. 특히 사설극장은 극장 문화의 대중화를 유발시킴으로써, 극장은 ‘관음의 공간’, ‘사교의 공간’, ‘연애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근대화를 효율화시킬 수 있는 ‘훈육의 공간’으로 작용되었다. 이는 당대 극장에 대한 언론의 반응과 그것에 적용되기 시작한 여러 취체규정들-(남녀)좌석구분제, 시간제한법, 관객의 관극태도와 흥행업주의 주의상황, 공연 예제의 제한, 위생관리 등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유현주, 1920년대 연극문화와 신여성의 형성, 동국대 국문과 석사학위논문, 2004, pp9~18 참조.
이처럼 근대 극장은 공연문화의 형성 공간인 동시에 식민지 근대화의 경험, 근대 도시의 형성, 새로운 대중문화 주체의 출현 등 다양한 이슈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특수한 경험양식이라 볼 수 있다. 박현선,극장 구경 가다: 근대 극장과 대중문화의 형성,《문화과학》제28호, 2001. 겨울, p164 참조.
그런데 극장이라는 근대적 공간이 상정하는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던 대중들은 어디까지나 경성지역에 국한되거나 아니면 전차를 이용할 수 있는 근접지역으로 편향되었다. 이러한 극장문화의 편협성에 대한 연극인들의 우려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다.
1930년대에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이후 약칭-극연)’ ‘극예술연구회’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극연 1기는 주로 홍해성이 연출을 담당한 1932년 5월부터 1934년 12월까지를 말한다. 1기의 중심은 주로 해외문학파를 중심으로 한 연구부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주로 번역극과 소극장론을 주장했다. 2기는 홍해성의 동양극장 이적 후 주로 유치진이 연출을 담당한 1935년 11월부터 1938년 2월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에는 유치진을 중심으로 한 실천부에 의해 창작극과 대극장 중심론이 전개되었다. 3기는 극연좌로 개칭하여 공연을 시작한 1938년 5월부터 1939년 5월 해산까지를 말한다.(이상우, 『유치진 연구』, 태학사, p318 참조) 물론 이 시기 구분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는 논자들도 있으나 본 논의의 중점이 아닌 관계로 생략한다.
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연극의 대중화 운동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브나로드운동(1931~34)’과 연계되면서 ‘농촌(농민)’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브나로드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이 내세운 농민(농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른바 ‘농촌계몽운동’ 또는 ‘개량주의 농민운동’으로 평가되는 민족주의자들의 농민(농촌)운동은 한편으로 일제가 체제안정책의 일환으로 제기한 ‘농촌진흥운동’ ‘농촌진흥운동’은 농민 스스로 궁핍으로부터 탈피하게 한다는 이른바 ‘자력갱생(自力更生)’과 이를 보조하기 위해 총독부가 마련한 각종 시책인 ‘진흥대책’의 두 측면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1932년에 시작된 제1기 공작으로서 ‘부락조직사업’과 1933년에 시작되는 제2기 공작으로서 ‘농가갱생계획’의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제1기 공작은 색의(色衣)장려, 금주금연, 단발장려, 도박금지, 관혼상제의 간소화, 미신타파 등의 ‘정신수양’과 ‘생활개선’에 중점을 둔 것으로 실제 진행과정에서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여 농가의 경제적인 ‘갱생’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 수립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1933년 제2기 공작으로 ‘농가경제갱생계획’이 수립되어 시행되었다. 이는 ‘정신의 작흥’과 농민의 분발을 기초로 일제의 물질적 보조를 동반한 자급 자족적 농민의 ‘갱생계획’이었다. 하지만 ‘농가갱생계획’은 농촌에 잠재한 잉여노동력을 극도로 착취하고, 자작자급을 강조하여 내핍생활을 강요함으로써 농민들에게 ‘갱생’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2003, pp240~2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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