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具常) 구상준(具常浚)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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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구상(具常) 구상준(具常浚)론
< 목 차 >
1. 구상의 생애    
2. 구상 시의 특징
3. 구상의 시작 세계
4. 구상 시의 의의
1. 구상의 생애
시인 구상은 1919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부 구종진, 모 이정자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상준인데, 작품 활동은 주로 ‘구상’이란 필명으로 하였다. 그의 외가는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이었으며 구상의 아버지도 결혼과 함께 천주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구상이 네 살이 되던 해인 1923년에 아버지가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가톨릭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아 북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구상은 열다섯에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을 한 뒤, 일반 중학에 진학했다가 퇴학당하여 마을에서 ‘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결국 먼 유랑의 길을 떠난 곳이 동경이었고, 도쿄 니혼대학 종교과에서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와 서구 급진 사상을 경험한 뒤 1942년 귀국해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지 시집 『응향』에 「밤」,「여명도」,「길」등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으나,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로부터 반동작가로 규탄을 받고 응향 필화사건.
1947년 분단 직전에 탈출, 월남했다.
서울에 와서 발표한 첫 시는「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이며, 이때부터 서울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1951년에 처녀 시집「구상具常」을 발간했다. 6 25 때에는 국군과 더불어 종군 작가단 일원으로 참전함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 우리 역사의 비운을 증언하는 선봉이 된다. 이때 그는 국내외 소식과 전투 상황, 그 전과를 담은 전단인「승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수복 후에 국방부 기관지『승리일보』로 창간되게 되었고 구상은 1953년 휴전까지『승리일보』를 주재하며 국방부의 일원으로 일한다. 이렇게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동족상잔의 참혹상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한 사실을 시적 안목으로 형상화 한 것이 1965년 출간된 연작시인「초토(焦土)의 시(侍)」이다. 이는 6 25 전쟁을 소재로 섭리와 자유, 선과 악, 이념과 민족 등의 실존 의식과 감정을 표출한 연작시로서, 인간의 존재 문제를 준엄하게 따져 묻고 역사 현실을 투사, 시와 시인이 지녀야 할 삶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 1953년에는『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았는데, 민주 정치 수호를 위해 이승만 독재정권에 적극적이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글들을 실어 여러 차례 압수를 당하는가 하면, 괴한이 구상의 집에 권총을 쏘며 침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한동안 피신하는 곤경 속에 있기도 하였다. 그 때의 글들을 모아『민주고발』이라는 책제를 붙여 발간하고 야당의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문화부장을 맡아 집단 데모와 정치집회를 이끄는 등의 활동을 하자, 이승만 정권은 1959년 ‘레이더 사건’ 자유당 정권은 이적(利敵) 병기(兵器)를 북한에 밀반출하려했다는 혐의로 구상 시인을 잡아넣었다. 구상 시인의 친구가 남대문 시장에서 미제 진공관 두 개를 동경대학교에서 연체생물 연구를 하고 있는 사위에게 사 보낸 것을 구실 삼아 반공법 위반죄로 그와 친구를 잡아넣은 것이다. 검찰은 그에게 15년형을 구형했다. 이에 대해 구상 시인은 최후 진술에서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有期刑囚)가 되느니보다 무죄가 아니면 사형을 달라”고 말했다. 다행히 재판관이 무죄를 선언함으로써 그는 6개월여 만에 풀려났다.
을 조작하게 되고 구상은 반공법 위반과 이적(利敵) 행위의 죄로 6개월간 옥중 생활을 한다. 그 사건 후 구상은 현실에서 일체 손을 떼고 오직 문학만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1967년에는 장편 연작시「밭일기(日記)」를 발표하였는데, 이 시는 60년대 문학의 소산으로 손꼽혔으며 땅과 생명력에 대한 관심과 일제 수탈의 민족적 굴욕, 기독교 정신의 근본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70년대에 와서는「하와이 사생시초(寫生詩抄)」,「강(江)」,「까마귀」,「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등 네 편의 연작시를 썼으며, 80년대의 연작시「그리스도 폴의 강(江)」은「강(江)」의 속편이다.
《경향신문》, 《가톨릭신문》 등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효성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는 것은 물론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1976년부터 중앙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했으며, 1979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6년부터 중앙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1998년부터 흥사단 명예단우 등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비롯해 희곡과 시나리오 수필 등의 작품 활동도 꾸준히 병행 하다가, 청년기 때부터 앓던 폐결핵으로 2004년 5월 별세하였다.
2. 구상 시의 특징
① 연작시 김은경, 구상의 연작시 연구: 그리스도 폴의 강을 중심으로
연작시란 흔히 한 사람의 시인이 하나의 주제 아래 내용상 관련이 있는 시를 잇달아 쓴 것을 이르는 말이다. 구상은 스스로 “한국에서 연작시를 시도한 효시의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1956년 『초토의 시』 15편을 시작으로 90년대까지 방대한 연작시 작업에 몰두했다. 구상은 「나는 왜 연작시를 쓰는가?」라는 글에서 자신이 연작시를 쓰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1950년대 『초토의 시』를 비롯해 1960년대 『밭일기』 100편,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와 손대고 있는 「강」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머리가 지둔한데다 끈기마저 없는 사람은 촉발생심이나 응시소매 격으로 시를 써가지고선 도저히 자기 세계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요, 또 사물의 실재나 실존을 파악하는데도 한 편의 시로 끝을 맺고 나면 그 존재의 무한하나 다면성이나 내면적 복합성을 인식하고 조명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한 주제에다 한 소재를 가지고 응시를 거듭함으로써 관입실재 해 보려는 의도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