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당송의 산문 고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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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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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당송의 산문(고문운동)
1. 당대
1) 고문 운동의 흥기
한말 위진 이래 산문은 사부(辭賦)의 영향을 받아 변려화(騈儷化)되어 변문이 출현하였고, 이는 남북조를 거쳐 초당 까지 매우 성행했다. 변문은 그 형식이 지나치게 엄격하여 자유롭게 사상내용을 표현할 수 없고 구어와도 차이가 매우 컸다.
하지만, 당 왕조가 세워지면서 과거제도가 시행되어 문학 방면에서는 혁신이 일어났다. 시보다 문장 방면에서의 개혁은 비교적 늦어, 중당에 이르러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변문을 반대하며 고문운동을 일으켰다. 유미주의 문학이 순수문학의 발전에는 공헌을 했지만, 문학이 인생과 사회를 이탈하여 형식미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반동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볼 때 당은 안사(安史)의 난 이후 외족의 침략과 지방군벌의 할거로 퇴조 하였다. 사상적으로도 불교와 노장사상의 성행으로 유교사상이 쇠미했다. 이에 일부 지식인들, 특히 한유는 유교를 제창하며 공맹(孔孟)의 도로 사회질서와 사상을 바로 잡으려 했다.
2) 고문운동의 발전
(1) 고문운동의 원류
육조시대에도 이미 유미주의 문학에 편중된 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梁)의 배자야(裵子野)는 「조충론(雕蟲論)」에서 당시 성행한 글들을 “음문파전(淫文破典)으로서 화려한 표현만을 능사로 삼는것”이라 비판하였다. 하지만 조충론 역시 변려문으로 쓰였다. 서위(西魏)의 소작(蘇綽)이 쓴 「대고(大誥)」, 수(隋)의 이악(李)이 쓴 「상수문제논문체경박서(上隋文帝論文體輕薄書)」도 새로운 문체를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말(隋末) 왕통(王通)은 「중설(中說)」에서 문장의 사회교화와 윤리를 강조하면서, 고문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켰다.
초당(初唐)시기에도 이백약(李百藥), 위징(魏徵)등의 역사가들이 「문원전(文苑傳)」, 「문학전(文學傳)」등의 서문 같은 곳에서 육조와 수나라 문풍을 비판하며 실용적인 문장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외 진자앙(陣子昻), 원결(元結)등도 문장의 수식보다 충효와 인의가 담긴 내용을 더 중시하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려문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이 결과 성당의 변려문은 변려체를 쓰면서도 내용의 표현에 힘쓰고 있어 육조나 초당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