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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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김성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성수
1915年 ○月 ○ 日
나는 1914년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나는 근대 문명에 대해 눈을 떴었다. 아마 그때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런 활동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송진우와 백관수와 같은 친구들은 여럿을 적 같이 공부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면서 근대화된 조국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 어린시절의 꿈을 안고 현재 나는, 일제시대의 우리 조국을 위해 힘쓰고 있다. 물론,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반일활동을 펼칠 필요는 없다. 눈 밖에 나봤자, 내가 추진할 계획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릴테니까..
나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립학교의 설립을 계획했다. 일본이 저렇게 급속히 강성해 진 이유는, 융통성을 가지고 개화에 눈을 떠 새로운 문물들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에따른 능동적인 교육활동이 이루어졌고, 한층 개선된 문화로 일본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새각한다. 나는 최남선과 안재홍 등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친구들과 함께 관련 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감시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결국 나의 첫 시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당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사립학교 운영에 관심을 쏟고 있던 나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학교운영을 통해 청년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하루빨리 주고 싶었다. 유학 이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되었던 꿈을 다시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나는 중앙학교 인수를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를 설득했다. 그리고는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4월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나는 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도입, 학교 운영을 근대적 합리적으로 바꿔나갔다. 더이상 전통적인 교육방법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우리조국을 구해내려면 새롭고, 한층 변화된 교육방식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발 벗고 나서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친다. 또한, 우리학교의 교복은 검정색의 무명옷으로 지정할 것이다. 일본의 구속을 받는다고 해서, 학교를 상징하는 교복마저 일본제품의 교복을 입힐 수는 없는 일이다. 학교안에서 우리나라의 대한 올바른 지식과 신념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몸가짐또한 바르게 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나의 교육신념을 조금씩 펼치고 있다. 어렸을 적 부터, 명문가이며 대지주 가문이라는 꼬리표로 나를 감시하는 조선총독부의 눈길을 조심해야만 할거다..
1917年 ○月 ○日
의류와 직물 섬유 대부분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고 있다. 지금 현재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수입방식은 일본에게만 유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같은 기업자들의 활동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 이렇게 놔두다가는 모든 경제력을 일본에게만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든다. 국가 주도의 경제 활성방안이 딱히 마련되지도 않았으니.. 내가 나서서 이 분야에 대해 개척을 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한국인이 세울 기업이라 하면 우리 백성들도 애국심으로 구입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이익이다. 이런 결심 아래 방직산업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경성방직 설립의 첫단계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사업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다.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이지만 한국인으로서 잘 해 나갈 것이다.
1919年 ○月 ○日
나는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한국 자본으로 세워진 순수한 민족 기업... 면직물 수입 증가로 위기를 맞고 있던 우리나라를 구출해 낼 한줄기 빛인 경성방직주식회사... 학교도 그럭저럭 잘 운영되는 것 같고, 면직물 분야에서도 나의 영향력이 가해지고 있다. 내가 가진 자본과, 신념이 일본에 맞서 대항할 수 있는 민족기업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 시장을 일본에게 뺏겨선 안된다..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은 학교에 검정무명옷을 교복으로 지정한 것도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우리가 만든 제품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세우는 경성방직이 내 이익도 증가시킬 것이 분명하지만 민족기업이라는 명분 아래 백성들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절대 일본의 손아귀에 먹혀 들지 않게 대기업으로서 강성해질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닌 해외에까지 널리 퍼질 수 있는...
1920年 ○月 ○日
3.1운동 이후 일본의 통치 방식이 변화한 것 같다. 총독도 사이토로 바뀌고, 뭔가 회유하는 방식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같다. 교육, 언론, 경제 분야 모두 우리나라의 권리를 존중해 주는 척하고 있다. 일본의 시꺼먼 속은 알 수가 없을 뿐...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기에 나는 언론의 탄압이 완화된 것을 기회삼아 신문사 창간을 준비해왓다. 작년 경성방직 설립으로 인해 재정적 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주어진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하루빨리 언론활동으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 몇일 동안 대출받는 걸 알아보고, 대출을 받으러 다니느라 몸이 지칠 대로 지쳤다. 그리고 드디어 신문사를 창간했다. 신문사의 이름은 동아일보이다. 중앙학교, 경성방직주식회사에 이은 동아일보... 교육과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언론까지.. 차근차근 내 신념을 실천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스럽다. 이제는 나라돌아가는 사정 모두를 사람들이 알 수 있겠지.. 교육받은 우리 백성들이 내가 설립한 동아일보사에서 발간된 신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